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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원 김영란의 삶/부부 인터뷰

최초의 여성 대법관으로 1년 보낸 김영란 대법관 & 강지원 변호사(1)

 

[궁금한 부부]

최초의 여성 대법관으로 1년 보낸 김영란 대법관 & 강지원 변호사

“앞으로도 소수자·약자의 인권 지키는 데 더 적극적인 목소리 낼 거예요”
글·송화선 기자 / 사진·박해윤 기자

지난해 8월 김영란 대법관은 ‘국내 최초의 여성 대법관’이자 ‘16년 만에 탄생한 40대 대법관’으로 주목 받으며 대법원에 입성했다. 1년이 흐른 지금 그는 자신의 대법관 생활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김 대법관과 그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인 남편 강지원 변호사를 만나 마음속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지난해 8월25일은 우리나라 사법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날이다. 40대 여성이던 김영란 판사(50)가 남녀차별과 연공서열의 벽을 넘어 대법관에 임명됐기 때문. ‘국내 최초의 여성 대법관’으로 1년을 보낸 김 대법관의 소회는 어떨까. 또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강지원 변호사(54)는 김 대법관의 지난 1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이런 궁금증을 안고 지난 9월 중순, 김 대법관의 경기도 분당 자택을 찾았다.

“일요일 아침부터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현관에 들어서며 김 대법관에게 첫인사를 건네자 “이미 한창 일하고 있는걸요, 뭐” 하는 답이 돌아왔다. 주말에도 보통 새벽 5시면 일어나 부엌 식탁에서 사건기록을 검토한다는 것. “이 약속 없었으면 지금도 일하고 있었을 거예요. 대법관이 된 뒤부터 새벽 5시가 이 사람의 기상시간이고, 동시에 출근시간입니다.” 옆에 있던 강 변호사가 말을 거들었다.

대법관은 판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 하지만 업무량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다고 한다. 지난해 대법원이 처리한 사건은 모두 2만 건. 총 14명인 대법관 가운데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을 제외한 12명이 한 사람당 약 1천7백 건씩 담당한 셈이 된다.

대법관 한 명이 처리하는 사건 수 한 해 1천7백 건, 하루 종일 사건기록에 파묻혀 살아

그래서 김 대법관은 지난 1년을 돌아볼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참 많이 바빴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평일에는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6시 퇴근할 때까지 30분 남짓 구내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계속 기록을 검토하고, 퇴근해서도 저녁식사와 집 근처 헬스 클럽에서의 운동, 잠깐 동안의 독서시간을 제외하면 잠자리에 들 때까지 재판 자료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고. 주말 역시 특별한 일이 없으면 같은 일과가 이어졌다.

“우리나라 최고 법원의 판결문이 우리집 식탁 위에서 만들어진다면 사람들이 깜짝 놀랄 거예요(웃음). 하지만 이 사람은 출근 전, 퇴근 후 자투리 시간마다 어김없이 저곳에서 일을 합니다. 근무시간만 갖고는 엄청난 업무량을 다 소화할 수 없다는 거죠. 문제는 눈을 너무 혹사시켜서 시력이 자꾸 떨어진다는 거예요. 대법관 된 뒤 벌써 안경을 여러 번 바꿨어요. 안구건조증도 점점 심해지고.”

강 변호사의 목소리에선 부인의 건강에 대한 염려가 듬뿍 묻어났다. 하지만 정작 김 대법관을 고통스럽게 하는 건 업무량보다 ‘내가 판결을 내리면 끝’이라는 부담감이라고 한다.

“제가 내리는 결정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면 정신이 번쩍 들어요. 대법관은 소송 당사자를 직접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자료를 끊임없이 읽고 또 읽으며 최선의 결론을 찾기 위해 노력하죠. 그 과정에서 느끼는 심리적 스트레스가 적지 않아요.”

판사를 설득하기 위해 자신의 안타까운 사연을 절절히 적어 보내는 사건 당사자들의 글도 그를 힘들게 할 때가 있다고 한다.

“형사재판의 경우 징역 10년 이상이 선고된 사건이 아니면 대법원에서 형량을 고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상고심에 올라오는 사건 가운데 상당수는 ‘징역을 줄여달라’거나 ‘벌금을 깎아달라’는 내용이죠. 기록을 읽어보면 그들의 사연이 얼마나 마음 아픈지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을 위해 벌금을 저리나 무이자로 빌려주고 나중에 갚게 하는 시스템을 마련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까지 해봤어요. 하지만 그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대법관으로서 제가 쓸 수 있는 판결문은 ‘양형(量刑 : 형벌의 정도를 헤아려 정함)은 상고 이유가 되지 않는다’ 한 문장뿐이죠. 그렇게 사건을 끝내고 나면 참 안타까워요.”

그러나 김 대법관이 이런 심리적 부담의 무게에 눌려 자신의 역할을 소홀히 한 건 아니다. 그는 대법관 임명 당시 “사회의 그늘에 있는 소수자와 약자의 인권 보호를 위해 일하는 대법관이 되겠다”는 뜻을 밝혔고, 지난 1년 동안 이들에게 의미 있는 판결을 다수 내놓아 화제를 모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