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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원 김영란의 삶/부부 인터뷰

이웃들이 더 잘 사는 세상을 만드는 데 보탬이 되고 싶다(3)

(2편에 이어서)

LADY 남성 중심 문화에서 여성이 여성으로서 요구되는 전통적인 역할 위에 사회적인 전문성을 더하기란 쉽지 않죠. 김 위원장님도 사회활동을 하는 여성으로서 힘든 점이 있었나요?
김영란


여성이 사회 진출을 하는 초기에는 '동화주의 모델'을 따르게 돼요. 남자들과 똑같아지려고 애쓰는 거죠. 여성적으로 보이지 않으려 하고 더욱 공격적으로 행동한다든지 하는 거죠. 하지만 평등한 문화가 확산된 사회일수록 여성성이라든가 남성성은 개인의 '퍼스널리티'로 취급되죠. 남자들 중에서도 '여성성'을 가진 경우가 많잖아요. 각자의 개성과 스타일을 살려 일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것 같아요. 개인의 특성, 자질, 능력으로 평가받는 사회가 발전된 사회라고 생각해요.

늘 여자가 한두 명밖에 없는 환경에서 일해온 저도 처음에는 그랬던 것 같아요. 게다가 여성이 극히 소수니까 오히려 불이익을 받기보다는 무조건 보호되어야 하는 대상으로만 인식됐었죠. 예를 들어 판사는 지방 교류 근무를 하는데, 여자 판사는 지방 근무를 안 시키는 거예요. 제가 경기도 바깥으로 나간 최초의 여자 판사였어요. 그런 식으로 초반에는 보호를 받았지만 그 때문에 제 개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었던 것 같아요. '다수'에 저를 맞추려고 노력했고요. 너무 남성적인 것도, 너무 여성적인 것도 아닌 그 교집합의 범위 안에서만 행동하려다 보니 자신의 자질을 끌어내는 데는 미숙했어요. 구성원 모두가 성별과 같은 상징적 지위를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소질과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때 좋은 성과가 나오는 건데, 어떻게 보면 저는 그 진입 단계에서 그만둔 게 아닌가 싶어요.

강지원

이 이야기는 지금 젊은 세대들이 주의 깊게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김 위원장이 소속된 세계는 그래도 의식적으로나마 균형성을 견지하려 하는 편이지만 우리나라 대부분의 일터에서 여성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란 쉽지 않은 현실일 겁니다. 결혼, 출산, 육아와 같은 문제가 맞물리면 문제가 심각해지죠.

김영란

저 또한 심각하게 사직을 고려한 적이 있을 만큼 가정과 일 사이를 오가는 것이 쉽지 않았어요. 결혼한 여성이 일터에서 자기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부분이 많아요. 능력을 나눠 써야 하니까요. '슈퍼우먼'은 존재할 수 없어요. 결국 어느 한쪽이 희생을 당할 수밖에 없는데 제 경우에는 가정이, 가족이 어느 정도 희생해준 거죠.

그런 면에서 사회적으로 제도와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특히 우리 사회는 아이들 교육에 있어서는 지나치게 과잉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부분만 절제해도 훨씬 나을 거예요. 우선 문화와 인식이 바뀌어야 하고 또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하죠. 저는 여자 후배들을 만나면 "여자 판사 수가 늘어나고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활발해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영향력 있는 의사결정을 하는 상위 그룹에는 충분히 진출해 있지 않기 때문에 후배들을 위해서 혹은 다른 여성들을 위해서라도 더욱 치열하게 '메이저리티'에 진입해야 한다"고 말해요. 호주 등에서는 여성 법조인 수가 늘어나면서 양육 및 교육의 부담을 더는 각종 지원책이 생겨났다고 해요.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정책 변화도 이끌어냈고요.

강지원

이제는 일과 가정 양립의 새로운 모델을 개발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그것도 아주 획기적으로요. 특히 육아에 있어서는요. 우리 세대는 부모 세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고, 또 사회 환경이 지금과 달랐기 때문에 어떻게든 꾸려올 수 있었지만 지금 젊은 세대들은 문제가 심각하죠. 무조건 여성들에게 열심히 하라고 독려하거나 능력을 키우라고 닦달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에요. 프랑스처럼 획기적인 정책 변화가 필요할 거예요. 개인적으로는 '의무 보육제'와 같은 것을 주장하는데, 특히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육아와 교육에 관한 지혜를 짜야 할 때가 아닌가 싶어요. 앞으로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늘어나겠죠. 아직도 사회 전체가 남성 중심적으로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여성적인 감각과 역량을 필요로 하는 면이 많으니까요. 저는 이 전환기를 능동적으로 수용해서 양성적인 사회로 발전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LADY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두 분은 생각하는 방식이나 가치관, 사회에 대한 인식과 방향성까지도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각자의 영역에서 소신껏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내재적인 지지와 믿음이 있어서가 아닐까요?

강지원

사실 가정에서부터 좀 전에 이야기한 '양성 사회' 확립이 이루어져야 해요. 그러려면 일단 남성들이 변화할 수밖에 없는데요. 무엇보다 남자들이 본능적으로 갖고 있는 지배적 욕구를 포기하는 훈련을 해야 해요. 이제는 그렇지 않으면 '쫓겨나는 시대'가 되었거든요. 저 또한 끊임없이 그 욕구를 포기하는 노력으로 점철되어온 인생이죠(웃음). 남자들은 좌뇌적 사고를 많이 하는데다 그동안 남성주의적 한국사회에 길들여졌기 때문에 상대를 지배하고자 하는 욕구를 포기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게 쉽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이건 앞으로 부부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에요. 대신 여성들은 남자들이 지배적 욕구를 버리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아줬으면 해요. 그걸 당연한 것처럼 치부해버리면 갈등이 생기는 거죠.

김영란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똑같아요. 인간에게는 누구나 본능적으로 지배적 욕구가 있거든요. , 권력을 좇는 것도 그 때문이죠. 그게 젊었을 때는 참 쉽지가 않은데, 점점 나이가 들면서 '지배적 욕구를 포기해가는 것이 사람의 인생이구나'를 깨닫게 돼요. 욕심도 버리게 되고, 그러다보니 자연히 싸울 일도 줄어들더라고요.




LADY 두 분 함께 계실 때 서로 쳐다보면서 자꾸만 웃으시는 걸 보면 여간해선 싸우지 않으실 것 같은데(웃음). 판검사 부부는 어떻게 싸우는지 궁금해지는데요.

김영란

결혼 초반에는 우리도 싸움 엄청나게 했죠. 가끔 판결문 들먹이면서 싸우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당연히 그렇진 않고요. 집요하게 따지고 드는 편이긴 했어요. 그런데 사실 부부 싸움이 집안일이나 작은 대화에서부터 비롯되잖아요. 판결을 내릴 것도 아닌데 논리적으로 따질 수 있는 게 아니죠.

강지원

그런데 처음에 그렇게 싸우다 보면 각자의 모습을 보게 되고 인정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결혼식 주례를 할 때 '젊었을 때 열심히 싸워라'라는 이야기를 많이 해요. 싸우면서 풀어가는 방법을 연구하라고요. 그게 점차 익숙해지면 싸움도 잘 소화가 될 거예요. 사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생활을 같이하면 싸울 일이 생기는 건 당연해요. 싸워가며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법을 배우는 거죠.

김영란

부부 사이는 물론 자녀를 키울 때나 사회생활을 할 때도 '서로 다르다'라는 걸 인정해 나가는 과정이 핵심인 것 같아요. 우리는 지나치게 획일적인 분위기 속에서 살아온 편이라 '다름'을 잘 인정하지 못해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한 전형적인 기준이 있고, 거기서 벗어나지 않도록 자신을 맞춰가며 살았잖아요. '다름'에 대해 인정은커녕, 가만히 두고 보는 것조차 못하는 문화였죠. 하지만 이제는 다양성을 존중하고 오히려 독려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 같아요.

흔들림 없이 꿋꿋하게, 욕심 없이 진실되게

강지원·김영란 부부의 인터뷰는 경기도 화성에 위치한 자택에서 이루어졌다. 강남 한복판 '노른자위 땅'에 위치한 것도, 그렇다고 서울 근교 고급 전원주택도 아닌 이 아파트가 첫눈에 마음에 든 부부는 20년간 살던 집을 전세로 놓고 2년 반 전에 여기로 옮겨왔다. 날이 갈수록 복잡해져만 가는 동네가 답답해지려는 때에 마침 이 단지에 사는 지인의 집에 놀러 왔다가 맑은 하늘과 신선한 공기, 근처에 자리한 나지막한 산을 보고 당장 이사를 결심한 것. 집 안 곳곳에는 부부처럼 소박한 가구들이 놓여 있고,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거실에는 선한 인상이 꼭 닮은 부부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대법관 퇴임 이후 거액의 수임료를 올릴 수도 있는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밝힌 김 위원장과 그리고 그 결정을 누구보다 큰 박수로 지지했다는 강 변호사의 평소 생각을 엿보게 하는 단정하고 진실된 모습이었다.

LADY
환갑을 맞이하고, 법관 생활을 마감하는 등 최근 두 분 모두 굵직한 인생 고개를 넘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셨을 것 같은데요. '행복한 인생'에 대한 고민을 놓지 않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강지원

최근 며칠간 자살예방법 국회 통과 건으로 무척 바빴어요. 지난해 15천여 명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갈수록
자살률은 높아져만 가고 있어요. 행복하지 못하다는 거예요. 그동안 우리는 부를 축적하고 성장 파이를 키우는 데만 급급해서 많은 것을 놓치고 살았어요. 먹고사는 데는 성공했지만 심리적으로는 실패한 거죠. 그 대표적인 모습이 사사건건 남과 비교하는 습관입니다. 내가 1억원이라는 큰돈을 벌었을 때 기쁘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옆 사람이 11천만원을 벌었다고 하면 화가 나죠. 저는 이게 '다름'의 철학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김영란

대체적으로 우리는 자존감이 무척 낮은 편인 것 같아요. 그래서 자신을 공격하고 자학하는데, 스스로를 충분히 인정하고 자신에게 만족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해요. 자존감이 떨어지고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식이든 배우자든 돈이든 어딘가에 의지하려 들게 되죠.

강지원

저는 이제껏 살아오면서 돈, 권력, 명성, 인기… 이런 것들을 갖고 목표를 세워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그렇게 살아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요. 그런 건 수단일 뿐이지 목표가 아닙니다. '돈을 10억 벌겠다'는 거칠게 표현해서 짐승 같은 목표라고 생각해요. 돈이라는 수단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목표로 삼는 게 맞지 않을까요? 저는 어린이들에게 "꿈이 뭐니?"라는 질문을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대신 "무엇이 하고 싶니?",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니?"라고 물어요. 그게 진짜 꿈이고 목표니까요.

김영란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법조계 후배들이 제게 '대법관이라는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를 물을 때가 많은데, 저는 그때마다 "대법관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좋은 판사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얘기해요. 이렇게 얘기하면 '당신은 이미 이뤘으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다'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저는 '자리'가 아닌 '어떤 법률가'가 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난 30년 동안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하는 판사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살아왔고, 이제는 앞으로의 시간을 어떻게 채워갈지를 고민하려 해요. 제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 어떤 일을 좋아하는가를 천천히 찾아가야죠. , 일단 위원회 일에 최선을 다하고 나서요. 인생이 워낙 예측하기 어려운 거라, 우선 주어진 일부터 열심히 하고 나서 얘기해야 할 것 같아요(웃음).

강지원

저는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제가 조금이라도 세상에 보탬이 됐으면 좋겠고, 거기에 제가 가진 적성과 재능을 발휘할 수 있길 바라요. 나이도 자꾸 드는데, 몸이 움직일 수 있는 한 저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고 하면 최대한 힘을 보태고 싶어요. 행복한 사람들이 더 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면요. 그게 남은 인생의 일거리이자, 목표이자, 행복이 될 겁니다.

<글 / 레이디경향 이연우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