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3>
우리 집 가정교육 - 자녀들의 적성을 일순위로 생각하는 강지원 변호사의 ‘큰바위얼굴 교육법
하회탈처럼 웃으면 반달이 되는 눈을 가진 강지원 변호사의 일상은 분주하다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명성에 걸맞게 수없이 많은 사건들을 처리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타고난 재주가 너무 많아서인지 라디오 시사프로그램과 토크쇼를 진행하기도 한다. 아직도 그는 인기 있는 방송패널이고, 근사한 목소리로 성악을 부르며 간간이 시조집도 발간한다. 게다가 청소년 지킴이를 자임하고 나선 이후 ‘큰 바위 얼굴’이라는 청소년 잡지를 벌써 1년째 자비로 만들고 있다. 사생활이 존재할 것 같지도 않은 그에게 가정교육에 대한 화두를 묻는 것이 온당한 것일까? 하지만 그런 생각은 편견에 지나지 않음을 곧 깨닫게 되었다. 화려한 삶 이면에 독특하다고 할 만큼 지극한 자녀 사랑의 편린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청소년 문제를 접하면서 아이들에게 부모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절감하게 됩니다. 부모들이 지나치게 바쁘다 보니 무관심하고 방치하는 경우가 있어요. 자녀에게 소홀한 것이지요. 다른 한편으로는 과잉보호, 과잉간섭을 하는 측도 있습니다. 이들 모두 문제지만 결론적으로 양극단의 것들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자녀에 대한 간섭이 지나쳐서 서울 법대를 가라, 혹은 과외공부를 하라고 하는 것은 실상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대리만족을 위한 것입니다. 자녀의 개성을 말살하는 것이지요.”사실 그도 청소년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전에는 자녀들에게 한두 차례에 불과하지만 체벌을 가하거나 억지로 하기 싫은 것을 강요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 비행청소년들의 삶의 양태를 보면서 자신의 교육방식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타고난 탐구심과 연구의욕으로 청소년 전문가로 거듭난 그는 청소년 문제를 연구하다 보니 비행청소년에게 관심이 가서 심리학과 카운슬링을 공부했다. 그는 국내 최초로 청소년 범죄자들에 대한 사회봉사 프로그램을 도입하기도 했다. 그리고 많은 비행청소년들의 문제는 실상 부모의 잘못된 교육에서 싹튼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89년 서울보호관찰소장을 맡고 본격적으로 청소년 보호활동을 하면서 그의 삶도 교육관도 인생의 가치도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왔다. 세속적인 출세나 명예보다 더 소중한 것이 아이들의 미래를 밝혀주는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청소년 문제를 공부하면서 확실하게 인생관이 바뀌었어요. 출세하고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진정 행복한 삶인가 자문하게 되었습니다. 행복한 삶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잘하는 일을 마음껏 하고 스스로 만족하는 것임을 깨달았고, 이왕이면 이웃과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자고 결심하게 되었죠.”
이후로 강 변호사의 가정교육에도 변화가 왔다. 자녀들에게 단 한 번도 야단을 치거나 혹은 공부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질서 있는 방임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 첫 번째 실천으로 강 변호사는 자녀들을 외국어고나 특목고 대신에 대안학교에 진학시켰다. 첫째 딸 전라남도 담양에 있는 H고등학교를, 둘째 딸 분당에 있는 E고등학교를 들어갔다. 두 학교 모두 명문대학교 진학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제가 아이들을 대안학교에 보낸 것은 기존의 어떤 획일적인 교육도 강요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출세주의적인 교육이나 일류대학이 최고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판검사가 되면 동네에 경사가 났다며 호들갑 떠는 시대는 이제 지나갔습니다. 부모의 가치관을 아이들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관심은 분명히 가져야 하지만 그렇다고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저는 우리나라 교육 풍토가 썩었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을 출세의 방편으로 삼잖아요? 왜 그렇게 출세욕에 연연하는지 모르겠어요.”
아이들의 이야기가 나오면 강 변호사의 눈은 일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현재의 출세주의 교육관이 생긴 것은 과거 왕조시대(권의주의 시대)에 붙은‘사농공상’이라는 말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했다.농사를 짓거나 상업에 종사하는 이들 위에 늘 선비가 군림한다는 사고방식이 현재까지 이어져 ‘사’자 붙는 직업을 선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시대가 변했어요. 현대는 다양성의 시대입니다. 사람은 모두 다르게 태어납니다. 다양한 탤런트(재능)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죠. 예전에 탤런트는 ‘딴따라’라고 해서 사람 취급도 안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스타가 되어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엄청난 부를 축적합니다. 한류의 주역이 되기도 합니다. 스포츠를 잘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축구를 잘하거나 골프를 잘해도 공부를 잘해서 성공한 사람 이상으로 대접을 받습니다. 개성을 말살하는 것이 아니라 개성을 살려주는 교육이 바로 우리 시대의 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강 변호사의 자녀들도 공부와는 조금 다른 길을 걸었다. 첫째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몇 달 동안 청소년 축제 기획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다양성의 교육을 강조하던 그도 막상 첫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입시를 포기하겠다고 할 때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아빠, 저 수능 안 보겠어요. 아직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제 적성을 찾아보겠어요.”강 변호사는 잠시 생각을 하다 대답했다.“오케이, 좋다. 그렇다면 네가 갈 길을 찾아봐라.”누구보다도 학벌주의의 폐해를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첫째의 결정이 걱정이 되기도 하고 한편으로 자랑스럽기도 했다. 아이들은 누구나 꿈을 먹고 산다. 부모가 믿어만 준다면 그릇된 길을 가지 않는다는 자신이 있었다. 그해 겨울 아이는 자신의 인생계획서를 빼곡하게 써서 아버지에게 제출했다. 자신의 꿈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겠다는 내용이 씌어 있는 인생계획서를 보고 강 변호사는 눈물이 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겠다는 것, 적성을 찾아 용감하게 매진하겠다는 딸의 선언을 보며 당당한 어른으로 성장한 아이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해 아이는 아르바이트를 하더니 2월에는 해외여행을 가더군요. 여행을 갔다 오고 나서 진로를 결정하겠다고 하더니 진짜로 아르바이트 비를 모아 호주로 여행을 가더라고요. 호주에 갔다 와서 하는 말이 우리나라 유학생들이 너무 잘 논다는 거예요. 자기 나름의 비판의식이 생겼더라고요. 그러면서 한국 대학은 너무 획일적이라며 유학을 가겠다고 하더군요.”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 몰두했기 때문일까? 그리 공부를 좋아하지 않던 딸은 영어학원을 두 개나 끊어놓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다 몇 달 후 아예 미국으로 가서 영어를 공부하고 대학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그때도 강 변호사는 흔쾌히 딸의 요구를 수용했다. 지금은 미국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다. 둘째 딸 또한 자기 적성을 찾아가는 데는 언니 못지않았다.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영화에 엄청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아이는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며 한 해 재수를 해서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들어갔다. 가끔씩 강지원 변호사는 아이들이 스스로 적성을 찾아가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유전자 어디에 영화나 광고 같은 분야와 관련된 DNA가 있어서 그런 길을 찾아갈까 하는 생각도 들기도 한다.
“우리 부부의 경력을 아는 사람들 중에는 저 부부는 자녀를 명문대학에 보내기 위해 얼마나 힘을 쏟을까, 하고 생각하는 분도 있어요. 집사람이나 저나 모두 서울대 출신에 법조인이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다 아이들을 모두 대안학교를 보내고 자기 적성에 따라 진로를 결정하게 했다고 하면 놀라기도 하죠. 때로 당신들은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모두 갖춘 엘리트니 마음 놓고 안전한 투자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어보기도 해요. 그러면 저는 그럽니다. 에디슨의 집이 부자였느냐? 학교는 제대로 다녔느냐? 저는 아이들에게 사교육을 시키지도 않았고, 학원비를 대주지도 않았습니다. 자녀들이 스스로 인생을 결정하게 하는 것은 모험이 아니라 진정한 개념의 투자인 거죠.”사실 엘리트주의로 인해 피해받은 사람은 비단 청소년이나 엘리트가 아닌 사람들만은 아니었다. 우리 사회 엘리트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알게 모르게 엘리트주의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강지원 변호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소위 말하는 KS(경기고·서울대)에 사법고시 수석, 부인은 대법관, 강 변호사의 7형제 중 5형제가 서울대 출신이고 보면 우리나라에서 이만한 엘리트 집안도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트는 또 다른 엘리트를 밟고 일어서야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잘못된 질서이다. 확고한 신념이나 목표 때문이 아니라 당연히 서울대에 가고 당연히 고시에 합격하여 높은 자리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낳은 출세지상주의. 이들이 사회지도층이 되어 만드는 사회는 그야말로 끔찍한 것이었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청소년 전문가가 된 배경으로 자신의 성장과정에 대한 반작용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은 일이 있다. “전형적인 엘리트교육을 받아 개성을 말살당한 나와 같은 시행착오는 겪지 말아야 한다고 항상 강조합니다. 엘리트만 최고로 대접받는 사회는 차별을 양산하고 열등감과 공격성을 유발해 계층 간 폭력을 만들어내죠. 엘리트가 되지 못한 원망, 분노 등을 사회에 폭력으로 돌려주니까요.”우리 사회의 통념상 지나치게 파격적일 수도 있는 일이지만 강 변호사는 이를 그렇게 파격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강 변호사의 부인인 김영란 씨는 아이들의 어머니이니까 좀 다른 생각을 갖지 않을까? 하지만 부창부수라고 김씨의 생각 또한 다르지 않다고 했다. 오히려 김씨는 딸들이 여성으로서 우리 사회에서 주체적으로 일어서기를 바랐다고 한다. 김영란 씨가 사법고시를 보았을 당시만 하더라도 우리 사회는 철저한 가부장제 사회였다. 요즘 흔한 맞벌이 가정조차 별로 없던 시절이었다. 여자는 그저 집 안에서 집안일을 하는 것이 가장 큰 미덕으로 여겨졌다. 그런 풍토에서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대법관으로 등용되기까지 꾸준하게 법조인의 길을 걸었던 여성이었다. 그 때문에 딸들이 자신만의 길을 걷겠다고 할 때 묵묵하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24시간 아이 곁에 붙어 있어야 교육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 변호사는 딱 잘라 말한다. 아이들은 늘 부모를 주시하고 있다. 열심히 살아가고 사회를 위해 공헌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모습 속에서 부모의 그림자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강지원 변호사는 무엇보다 가정에서 부부로서 사랑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를 아이들에게 깨닫게 해주었다. 평등부부상을 수상할 정도로 잉꼬부부인 두 사람은 지난 1981년 강 변호사가 서울지검에 있을 때 김 대법관이 옆방의 검사시보(검사수습)로 오게 되면서 인연을 맺었다. 강단 있으면서도 진솔한 김영란 씨의 모습에 반한 강 변호사는 적극적으로 대시를 해 1년만인 1982년 3월 결혼에
이르렀다. 사회적으로 내로라하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김영란 씨는 집안에서 한번도 티를 내지 않았다. 신혼 때부터 묵묵하게 노모를 모시고 살다 노모가 돌아가셨을 때는 장례문화 개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외부에 부고장 한 장 보내지 않은 채 조용하게 모친상을 치렀다. 이런 부모의 모습 때문인지 아이들도 ‘누구의 딸’로 불리는 것을 싫어한다고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부모의 조용한 가르침 때문에 누구보다도 활달하게 성장했는지 모른다. 부모가 자녀를 교육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의 사회적 지위가 아니다. 부모가 가장 신경 써야 할 것은 아이의 적성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다. “아이들이 자신의 적성을 찾으면 신바람을 냅니다. 하고 싶은 일,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기 때문이죠. 또한 성과도 높아요.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너무너무 만족스러워합니다. 삶의 보람 때문에 하루하루가 즐거운 거죠.”강 변호사는 아이들의 적성을 키우는 특성화학교가 많이 세워졌으면 하는 것이 바람이라고 했다. 무용에 재주가 있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든다면 무용특성화학교를 세우면 더 저렴한 비용으로 무용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음악에 재주가 있다면 음악특성화학교를, 사진에 재주가 있다면 사진특성화학교를 세워서 청소년들이 자신의 특성에 맞는 학교를 마음껏 골라 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것이 입시 위주로 변질한 특목고를 많이 세우는 것보다 더 미래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뷰가 끝나갈 즈음 문득 강 변호사는 걱정을 늘어놓았다. “우리 아이들은 참… 독특하다고 할까? 자기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해요. 저번에도 한 매체와 인터뷰를 했다가 자기들 이야기가 나왔다고 얼마나 원망을 들었는지….” 그러면서도 미국에 나가 있는 첫째 딸이 생각나는지 지긋이 먼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이들에게 가끔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어요. 나다니엘 호손이 지은 ‘큰 바위 얼굴’이라는 이야기를 어려서부터 굉장히 좋아했거든요. 큰 바위 얼굴처럼 항상 고결하고 온화한 모습이 스승이 되어 결국 그를 닮아버린 어니스트처럼 우리 아이들도 삶을 열심히 살고 이웃을 위해 최선을 다하다 큰 바위 얼굴로 변하는 현명한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기원하기 때문이죠. 제가 너무 큰 욕심을 부리는 것일까요?”
[출처] 강지원 변호사의 ‘큰 바위 얼굴’ 교육법 (중국 비젼국제학교 설립 준비 위원회.) |작성자 빈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