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강지원 김영란의 삶/부부 인터뷰

강지원 “사퇴하고 지지해주면 돈·요직 주겠다 유혹, 단호히 거절”

강지원 “사퇴하고 지지해주면 돈·요직 주겠다 유혹, 단호히 거절”

 

 

대선 출마했던 강지원 변호사·김영란 전 권익위원장 부부
김영란, 총리 거론에 “불려나갈 일 없었으면.."

                                                                 경향신문  박주연 기자 | 입력 2013.01.11                        

 

정치개혁을 위해 대선에 출마했다 낙선한 강지원 변호사(오른쪽)와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 부부가 지난 8일 서울 삼청동 자택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면서 환하게 웃고 있다. |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 "평생 웃겨준다고 해서 결혼했는데"…"법정드라마처럼 싸웠다"

'띵동…' 초인종을 누르자 강지원 변호사가 환한 얼굴로 맞아주었다. 한 집 한 집 지번을 확인하며 같은 길을 몇번이나 오간 끝에 삼청동 북촌한옥마을의 꼭짓점에 자리한 집을 겨우 찾아낸 터라 강 변호사의 얼굴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그는 정장 차림이었다. "아침에 일이 있어 잠시 외출했다가 조금 전 돌아왔다"고 했다. 그를 따라 대문과 중문을 지나니 눈 덮인 아담한 마당에 서 있는 앵두나무와 매화나무가 눈길을 끌었다. 집은 기역자 모양이다. 비좁은 직사각형 마루엔 2인용 소파와 컴퓨터 모니터가 놓인 책상이 일렬로 배치돼 있었다. 방 두 개 중 하나도 더블침대 하나로 꽉 차 있었다. 강 변호사는 "마당을 포함해 40평 정도일 것"이라고 말했다. 부부는 나지막한 산과 논으로 둘러싸인 경기 화성의 아파트에서 살았다. 2010년 12월 김영란 전 위원장이 국민권익위원장 자리를 제안받으면서 급하게 월세로 얻은 게 삼청동 집이다.

"저는 전라도 광주에서 초등학교 3학년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삼청파출소 뒷집에 살았어요. 집사람은 부산에서 6학년 때 상경해 가회동 약국 뒷집에 살았고요. 나중에 알았지만 어린 시절 한동네에 산 거죠. 집사람이 국민권익위원장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은 데다 그보다 한달 전 저 역시 YTN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진행을 맡게 돼 서울에 살 집을 마련해야 했어요. 기왕이면 우리가 어린시절 살던 동네에서 살아보자 했죠. 한옥체험도 하고요."

강 변호사의 표정은 시종 밝았다. 농담도 잘했다. 반면 조용한 성격의 김 전 위원장은 한마디 한마디를 신중하게 내뱉는 스타일이었다. 성격은 정반대인 것 같았지만 30년을 같은 곳을 바라보며 동고동락한 부부답게 웃는 얼굴은 묘하게 닮았다. 강 변호사의 대선 출마 이야기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강지원 변호사와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 부부가 자택 대문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30년 동고동락한 부부답게 웃는 모습이 닮았다. 부부는 지난 2년간 월세로 산 삼청동 집을 떠나 경기도 화성 자택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 임명장 수십만장, 물불 안 가린 운동
후보 떡볶이 먹고 말춤 추는 것만 조명
이번 대선 여야·언론 모두 나쁜 선거


▲ 책임장관제·대기업 독식 척결 공약
새 정부에서 특허료도 안 내고 차용
그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해요


- 주변 사람들 모두가 말리는데도 굳이 대선에 출마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원래 전 감투를 좋아하지 않아요. 검사 시절에도 인사이동 때마다 남들은 요직을 두고 엄청나게 경합했지만 저는 되레 요직을 맡을까봐 피해다녔어요. 차장검사, 부장검사, 지청장, 검사장 다 안하고 고검 검사로 있다가 명예퇴직했죠. 이후 여러 정권에서 국회의원, 장관, 검찰총장까지 제안받았지만 다 거절했고요. 그런 제가 대선에 나선 것은 깨끗한 선거, 정책선거의 모범을 보여주겠다는 비장한 마음에서였어요. 지난 7년간 정책중심선거를 통한 정치개혁운동, 즉 매니페스토 운동을 해왔지만 (정치권이)달라지지 않는 것을 보며 본때를 보여주자고 결심했죠. 이틀을 밤잠을 설쳐가며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어요. 출마선언문도 새벽 5시에 일어나 단숨에 썼어요."

- 남편의 대선 출마를 어떻게 받아들이셨는지요. 나중엔 지지까지 하셨는데요.

"지지해준 게 아니라 말리는 것을 포기한 거예요(웃음). 6월부터 석달간 말렸어요. '설마 저러다 말겠지'했는데 그게 아닌 거예요. 도저히 말로는 설득이 안돼 휴대전화 문자로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출마를 해야만 하느냐, 꼭 그 방법밖에 없느냐'고 했어요. 한참 후 '나를 비행청소년이라고 생각하세요'라는 답문이 오더라고요. 그때 더 이상 말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9월 초 사의를 표명한 뒤 사표를 낸 거예요. 비행청소년을 어떻게 말리겠어요. 일단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해야 궤도를 이탈했다가도 돌아오는 거잖아요. 덕분에 저는 여고동창들 사이에서 무능한 아내 랭킹 1위에 등극했어요."

- 무능한 아내라니요.

"여고동창들이 '너는 그 나이에도 남편을 못 말리느냐'고 하더라고요."

- 권익위원장을 꼭 그만둬야 했을까요. 아깝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던데요.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누가 될 수 있고 선거 공정성에도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그러고보면 부부는 늘 이렇게 정도를 지키며 서로를 외조해왔다. 강 변호사도 2004년 김 전 위원장이 대법관에 임명되자 당시 진행하던 방송 시사프로그램 진행을 중단하고 법률사무소 대표 변호사직까지 사임했다. 행여 구설에 올라 아내에게 부담을 줄까봐 미리 스스로를 단속한 것이다.

서로의 사회생활과 관련해 어떤 원칙이라도 세운 것이 있느냐고 질문하니 "그때그때마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것"이라는 강 변호사의 답이 돌아왔다.

이때 김 전 위원장이 하나의 일화를 소개했다.

"제가 대법관이 되자마자 판사인 제 남동생(김문석 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에게 '지금이 변호사 개업할 찬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대요. 대법관인 누나를 이용해 사건을 수임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지 않겠느냐는 얘기죠. 저는 그때 그게 잘못된 사고임을 누구나 아는 사회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저희 부부도 그런 생각이 옳지 않다는 것을 사회에 알리는 역할을 하려고 노력해왔고요."

강 변호사는 이번 대선에 나서면서 '깨끗한 선거' '돈 안 쓰는 선거' '정책선거'를 표방했다. 확성기를 단 유세차를 운영하지도 않았고, 시장을 찾아 악수하는 유세활동도 하지 않았다. 구태정치를 탈피하려면 이 같은 '이벤트 선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대신 매일 자신의 사무실에서 '정책 토크쇼'를 하고 이를 유튜브와 홈페이지에 올렸다. '대기업의 자유보장과 동시에 약탈적 독식 척결' '중소기업부(부총리급) 신설' '어음제도 전면 폐지' '청와대 8개 수석비서관실 전면 폐지와 책임장관제 도입' '장관급 이상 공직자 급여반납' 등 눈에 띄는 공약들도 많았다. 강 변호사는 "지난 7년간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상임대표를 맡으면서 수많은 정책검증을 한 결과물들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정책은 후보 자신의 뼛속에서 나오는 철학과 경험으로 만들어야지 전문가들이 앉아서 머리를 짜서 내는 정책은 이후 실행 보장이 안돼요. 제 정책 중 몇 가지는 새 정부에서 특허료도 안 주고 가져다 쓰던데, 고맙게 생각해요."

- 어떤 정책인가요.

"예를 들어 요즘 새누리당에서 책임장관제를 하겠다고 하잖아요. 그 공약은 제가 처음 제시한 거예요. 책임장관제라는 용어 자체도 제 머릿속에서 나온 거고요. 또 청와대의 권한과 조직을 대폭 축소하겠다는 말이 나오던데, 저는 아예 청와대의 8개 수석 비서관제를 모두 폐지하겠다고 발표했죠. 제왕적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지 않고는 결코 성공한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철학에서 나온 공약이에요."

- 김 전 위원장은 선거에 나선 남편에게 어떤 도움을 주셨나요.

"퇴임 후엔 집에 있게 되니까 아침에 밥이라도 챙겨 먹이고 정책집 한번 읽어봐드린 것밖에 없어요."

김 전 위원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강 변호사가 말했다. 그 순간만은 강 변호사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사표수리가 너무 늦었어요. 9월4일 사표를 제출했는데 두달반 동안이나 수리를 안 해줬잖아요. 왜 그렇게까지 안 해줬는지 저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아주 유감스러워요. 선거를 방해할 의도가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매우 온당치 않았다고 생각해요."

김 전 위원장에게 좀 짓궂은 질문을 해봤다.

- 남편의 당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생각했습니까.

"당선되면 기적이겠죠. 그러나 되면 정말 잘할 거라는 생각은 했어요. 남편이 직접 만든 정책집을 정독도서관에 가서 읽어보니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아주 참신한 정책이 많았어요. '이런 정책을 제대로 펼칠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했죠. 남편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엎드린 채 정책을 써내려가곤 했어요."

그러나 군소후보들은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정책 역시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강 변호사에게 언론에 섭섭함이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한다고 봐요. 선거에서 언론이 할 일은 후보자가 떡볶이를 먹는 거나 말춤 추는 사진을 찍어 보여주는 게 아니라 정책을 자세히 알리는 거예요. 저는 선거기간 중 잘 아는 언론계 인사 누구에게도 전화 한번 안하고 밥 한끼 안샀어요. 정치부 기자들은 정당 출입하면서 밥 얻어먹기를 당연한 일로 생각하고 그것이 취재활동의 일환이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그것을 뜯어고쳐야 한다고 봅니다. 또 유력후보 중심으로 보도하는 건 이해하지만 군소후보들도 그들의 10분의 1이라도 보도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저는 기탁금을 올려서 10억원씩 받는 한이 있더라도 정책이 국민에게 전달될 수 있는 매체를 국가에서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는 "이번 대선은 나쁜 선거였다"고 규정했다.

"이번에도 특정 지역에서 80~90% 몰표가 나왔어요. 이건 선거가 아니에요. 지역감정을 선동한 결과일 뿐이죠. 그렇게 득표한 후보들은 부끄러워해야 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이가 아무도 없어요. 그만큼 당선을 위해선 물불을 안 가리는 썩어빠진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수십만장의 임명장이 나도는 등 편법조직선거가 난무했고 이미지선거, 이벤트선거, 돈선거도 여전했어요."

▲ 뭘 던지지는 않았고 주로 말싸움
져줬다 생각했는데 아내는 달라
솔직히 내가 쫓겨나지 않은 게 다행


강 변호사는 기성 정치권에서의 회유가 집요하고 끈질겼다는 사실도 털어놓았다.

"선거가 막판으로 치달으면서 양당에서 여러 채널로 제게 접촉해왔어요. 한 정당에서만 10개 이상의 채널이 오기도 했어요. '후보사퇴 후 지지선언을 하면 선거비용을 보전해주겠다' '요직을 주겠다'고 유혹하더군요. 실무진의 충성경쟁일 것으로 봐요. 제가 거기에 속아넘어갈 사람도, 그런 조건에 미동할 사람도 아니에요. 그런 선거풍토가 개탄스러워요. 물론 저처럼 새 정치를 천명한 안철수 후보와 저를 접합시켜보려고 노력한 사람도 있었어요. 저도 연대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기존 정치를 비판하던 안 후보가 한 정당의 후보와 단일화하면서 물거품이 됐어요. 저도 안타까웠어요."

- 깨끗한 선거, 정치가 말은 좋지만 너무 이상적인 구호 아닐까요. 정치가 원래 좀 지저분한 것 아닌가요.

"제가 이상을 추구한다는 건 인정하는데 그럼 이 흙탕물 정치판을 그대로 끌고 가기 원한다는 말인가요. 사회운동하는 사람들은 늘 꿈을 좇는 소년들 같아요. 과거 여성들이 핍박받을 때 여성운동한 사람들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여성의 사회참여가 늘었겠어요. 정치판은 어차피 흙탕물이라는 패배의식은 정치발전을 저해할 뿐이에요."

김 전 위원장도 "우리 사회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려면 그런 패배의식부터 물리쳐야 한다"고 부군을 거들었다.

가열되는 분위기를 좀 식혀야겠기에 다소 가벼운 질문을 던졌다.

- 선거비용으로 얼마나 쓰셨습니까.

"선거기간 중에 펀드로 모집한 채무가 5억~6억원 정도 돼요. 돈 안 쓰는 선거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 되도록 안 쓰려 노력했는데도 기탁금 3억원과 선거공보, 포스터 제작비 몇 억원 등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비용이 있더라고요. 전체 비용은 나중에 선관위에 보고하게 돼 있어요. 그때 정산을 해봐야 정확히 알 것 같아요."(강)

- 다 빚인가요.

"그렇죠. 갚아나가야 하는 거죠. 이 집의 월세보증금도 보태야지요."(김)

경제적 부담이 만만치 않을 텐데도, 부부의 얼굴은 평화로웠다.

"저는 사회에 기부했다고 생각해요. 그동안에도 알게 모르게 매년 꾸준히 기부하면서 살아왔으니까요. 집사람에겐 사후보고하면서요. 그런데 이번엔 너무 짧은 기간에 과잉기부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하하하…."(강)

"전 남편 사교육비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앞으로 뭘 할지 모르지만 이번에 고가의 수업료를 지불하고 배운 걸 사회를 위해 써먹겠죠."(김)

- 남편이 지난해에도 '청소년 적성찾기 기금'으로 1억원을 내놓으셨던데요. 부인 입장에선 꼭 좋지만은 않을 것 같아요.

"기부 후 제게 얘기했는데 알고보니 마이너스통장까지 썼더라고요. 제게 묻지 않고 하는 경우가 많아 저는 잘 몰라요(웃음)."

- 이번 선거로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있다면 뭘까요.

"정책중심 선거를 통한 정치개혁의 표본을 제가 보여준 것이 얻은 것이라면, 달성치가 크면 좋았을 텐데 전달이 미미했던 점은 아쉬워요."(강)

"얻은 것인지 잃은 것인지 모르겠는데 남편은 아이디어가 많고 새로운 생각을 많이 하는 굉장히 창의적인 사람이에요. 시대를 앞서가지만 주변에선 엉뚱하다고 받아들여지는 돈키호테와 같은 사람이기도 하죠. 그동안 저만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전 국민들에게 들킨 거죠(웃음)."(김)

▲ 남편이 대선 나가겠다 할때 결혼 후회
하도 어이가 없었으니까, 어이구 참…
선거비용은 남편의 사교육비라고 여겨


화제를 김 전 위원장으로 돌렸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대법관을 지냈던 김 전 위원장은 2011년 1월 국민권익위원장에 임명된 뒤 '부정청탁 금지 및 공직자의 이해충돌방지법(일명 김영란법)' 입법을 추진하는 등 청탁 문화 근절과 공직사회 부패 척결에 앞장서왔다. 김영란법은 한마디로 '스폰서'와 '떡값'을 뿌리뽑겠다는 법안이다. 그러나 입법예고까지 마친 이 법안은 관계기관 의견 조회 및 협의과정에서 법무부 역풍에 밀려 현재 난항을 겪고 있다. 김 전 위원장이 할 말이 많을 것 같았다.

- 법무부가 김영란법에 제동을 걸고 있는데요.

"이 법은 법무부가 주장하는 형법의 영역이 아니라 공무원 행동규범의 문제예요. 가령 검사가 사업가나 피의자를 만났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규범을 정해주고 어길 경우 어떻게 처벌할 것이냐를 다룬 거죠. 저는 입법을 굉장히 낙관했는데 법무부가 왜 이렇게 시간을 끄는지 모르겠어요. 우리 사회를 업그레이드하려면 엘리트들이 앞장서서 빨리 입법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만 공무원들이 국민들로부터 불필요한 오해에서 벗어날 거라고 봐요."

- 검사가 사무실에서 여성 피의자와 성관계를 갖는 믿지 못할 사건까지 벌어졌습니다. 검사들의 추문이 꼬리를 물고 있는데 원인이 뭘까요.

"지금은 공무원 수가 많아졌고 임용경로도 다양해지고 복잡해졌어요. 대가족으로 끈끈한 유대감 속에 저절로 윤리를 익히며 살았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사람들이 하나의 핵으로 살고 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행동강령을 엄격하게 만들어서 구체적으로 훈련시켜야 해요. 저도 처음 판사가 됐을 때 어려움을 겪었어요. 공부만 잘했지 아무것도 몰랐으니까요. 기자들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대기업 직원들도 하도급 업체로부터 청탁받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야 하는 시대가 됐다고 생각해요."

말이 나온 김에 시간을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갔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강 변호사가 서울지검 검사로 재직할 때 김 전 위원장이 옆방의 검사시보(검사수습)로 오면서다. 김 전 위원장의 선한 인상에 마음을 빼앗긴 강 변호사는 밥 사준다는 핑계로 김 전 위원장을 만났다. 처음에는 남자동기도 함께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둘만의 시간이 많아졌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82년 3월 결혼했다. 당시 두 사람의 결혼식 장면이 '9시 뉴스'에 나왔을 정도로 첫 여성판사와 검사 부부의 탄생은 화제를 모았다. 김 전 위원장에게 강 변호사의 어떤 점에 매료돼 결혼을 결심했느냐고 물었다.

"평생 웃겨준다고 해서 결혼했어요. 연애시절 남편이 굉장히 웃겼거든요. 지금도 배꼽을 잡고 웃을 때가 많아요. 반대로 저는 유머가 없는 사람이라 부러웠어요. 그런데 결혼해서 보니까 유머만 먹고사는 게 아니더라고요."

- 어떤 의미인가요.

"전문직으로 사회활동하는 여성이 거의 없던 시절이라 마땅한 롤모델이 없어 어려움이 많았거든요. 제가 최초의 여판사는 아니지만 여검사도 없던 시절이에요. 퇴근 후엔 기존 사회가 요구하는 며느리 역할을 다해야 했어요. 심지어 판사들이 회식을 하면 저를 들여보내고 대신 남편을 불러내 술을 마셔요. 저는 의아했죠. 그때만 해도 여자는 집에 가서 살림해야 한다는 게 보편적 인식이었던 거예요. 남편조차도 제가 시집와서 신문을 보니까 '여자도 신문을 봐?' 그러더라고요."

괜스레 미안해지는지 강 변호사가 끼어든다. "놀리려고 그런 거지. 좀 신기하기도 했고. 하하하…."

맞벌이를 하면서 슬하에 두 딸을 둔 김 전 위원장은 2004년 시어머니가 작고할 때까지 시부모를 모시고 살았다. 시부모가 말년에 치매를 앓아 두 분의 대소변을 직접 받아냈다. 부부는 양가 어른이 작고했을 때 장례문화 개선을 위해 부고를 일절 하지 않아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2011년 3월에도 김 전 위원장은 해외출장 중 부친상을 당했으나 일정을 모두 소화했고 귀국 후에도 외부에 일절 알리지 않고 상을 치렀다.

- 부부싸움은 어떻게 하시나요. 젊을 땐 물건이 공중으로 날아다니기도 했나요.

"결혼 초기엔 엄청 싸웠죠. 뭘 던지지는 않았고 주로 말싸움이었어요(웃음)."(김)

"TV 법정드라마처럼 싸웠어요. 둘 다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이라 논리적으로 승복해야 손을 들거든요."(강)

- 주로 누가 이겼습니까.

"그 점에선 서로 주장이 달라요. 저는 제가 져줬다고 생각했는데 아내는 다르게 말하더라고요."(강)

"몇년 전 우연한 대화 중에 몇십년간 서로 자신이 져줬다고 생각해왔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어요. 남편은 정식으로 사과해주길 바랐던 거예요. 저는 아무일 없던 것처럼 밥 차려주고 챙겨주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서로 몰랐던 부분이 있더라고요. 아마 죽을 때까지 이런 게 계속 나오지 않을까요."(김)

- 결혼을 후회해본 적 있나요.

"자기는 있겠네(웃음)."(강)

"있지. 대선 출마한다고 했을 때 진짜 결혼한 거 후회했지. 하도 어이가 없었으니까. 어이구 참…."(김)

"솔직히 제가 쫓겨나지 않은 게 다행이죠. 하하하…."(강)

오전 11시 삼청동 자택에서 시작한 인터뷰는 가회동 피자집으로 자리를 옮겨 이어졌다. 한참을 이야기하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오후 3시가 넘었다. 자리에서 일어날 시간이었다. 강 변호사에게 5년 후 대권에 다시 도전할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돌아온 답은 "안 한다"였다. 그는 "대선에 출마했다고 해서 정치인으로 불리는 건 정말 사양한다"며 "다음에 국회의원 출마하라는 말도 있지만 안 한다. 오히려 정치개혁을 위한 목소리는 더 강하게 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백수의 입이 세요(웃음)."

대신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그는 "이번 대선으로 국민이 완전히 반으로 쪼개졌고 이런 국가적 위기를 정치꾼들이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이어 "당선인은 집권자의 승리감에 도취해 있을 때가 아니라 48.45%의 상처 입고 좌절한 국민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100%의 대한민국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김 전 위원장은 새 정부의 헌법재판소장에 이어 감사원장, 총리 후보까지 주요 요직의 물망에 끊임없이 오르고 있다.

김 전 위원장은 일단 "제가 특별히 불려나갈 일이 없으면 좋겠다"며 선을 그었다.

피자집을 나와 강 변호사는 다른 약속이 있다며 총총히 사라졌다. 김 전 위원장은 기자를 배웅한다며 삼청동 길을 같이 걸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오랜 잔상을 남겼다. "저는 언론이나 사람들이 남편이 쓴 선거비용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지 않았으면 해요. 남편의 진정성이 훼손당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파요."

1949년 전남 완도 출생. 1972년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하고 같은 해 행정고시(12회)에 합격했다. 1976년 사법시험(18회)에 수석 합격한 뒤 검사로 재직했다. 1989년 서울보호관찰소장을 맡은 것을 계기로 청소년 선도에 앞장섰다.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청소년보호위원장을 지냈고 2002년 검찰을 떠난 후에는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상임대표·자살예방대책추진위원장·대통령직속 사회통합위원회 지역분과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56년 부산 출생. 1978년 서울대 법대 4학년 재학 중 사법시험(20회)에 합격했다. 2004년 40대 후반 나이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대법관으로 임명됐다. 2010년 8월 대법관에서 퇴임할 때 참여연대로부터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권리를 신장시키려 노력하는 등 시민사회의 가치 기준에 부합하는 판결들을 내놓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1년 1월 국민권익위원장에 임명됐다. 강지원 변호사의 대선 출마로 지난해 11월 국민권익위원장직에서 물러났다.

<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

 

 

김영란·강지원 부부의 인생철학… 인생 2막

“돈은 목적이 아닌 수단” 30년 된 가구·그릇 그대로
“하고 싶은 일 하며 살자” 두 딸 모두 대안학교 보내
경향신문 | 박주연 기자 | 입력 2013.01.11 21:52 |  

 

 

 
 

강지원 변호사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 부부를 보면 '모범생' 이미지가 절로 난다. 사법시험을 합격한 수재라는 의미가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이나 태도, 인생관 자체가 그렇다.

부부는 인생 2막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두고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우선 몸이 허락하는 한 죽을 때까지 일하되 돈벌이를 위한 일은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강 변호사는 60세가 되던 2009년 변호사 사무실을 폐쇄했다. 김 전 위원장은 2010년 대법관을 퇴직하면서 변호사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돈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어야 하고, 먹고사는 데만 지장이 없으면 된다는 게 이들 부부의 돈 철학이다.

 

31년 전 김 전 위원장이 시집올 때 해온 가구와 그릇, 이불을 지금까지 사용할 만큼 부부는 검소하다. 흔한 자가용 승용차도 없다. 부부 모두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김 전 위원장은 "우리는 새 물건을 사는 데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일 뿐"이라며 "책 사고, 영화 보고, 여행하는 데 돈 쓰는 것은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은 '고시공부'(강)와 '법대 진학'(김)이다.

강 변호사는 고시공부를 안 했다면 좀 더 일찍 봉사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전 위원장의 소녀시절 꿈은 독문과에 진학해 문학평론가가 되는 것이었다. 경기여고 시절엔 문재(文才)를 보였다. 하지만 교장선생님과 부모의 강권으로 서울대 인문계열이 아닌 사회계열에 진학해 법학을 전공했고 사법시험에 붙고 나서부턴 다른 길을 생각하지 못했다.

부부는 인생 2막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기로 했다.

강 변호사는 "봉사하는 삶"을, 오는 3월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석좌교수로 복직하는 김 전 위원장은 "철학서와 사회과학·인문과학 서적을 두루 읽으며 공부하고 싶다. 여행도 많이 다니고 싶다"고 했다.

적성과 자유의지를 우선에 두는 것은 자녀 양육 철학이기도 하다. 큰딸 (30), 둘째딸 (26) 모두 대안학교를 졸업했다.

"저는 무조건 공부하라거나, 무조건 대학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 딸들에게도 그랬고요. 저의 대선 공약에도 있었지만 교육의 기본은 소질과 적성을 찾아주는 것이지 대학 가는 게 아니에요. 대학은 30%만 가면 되고, 70%는 적성 찾아 가면 돼요."(강)

"항상 아이들의 판단과 결정을 존중했어요. 최대한 자유를 줬죠.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고, 극복하면서 스스로 다음 단계로 발전해나가는 게 옳다고 생각하거든요. 아이들과 함께 책방에 가도 제가 책을 골라주지 않고 아이들 스스로 선택하게 했어요. 전집을 한 질로 집에 들여놓지도 않았고요. 제가 보기엔 '뭐 이런 책을 읽나' 싶을 때도 있었지만 아이들의 책 읽는 수준이 자연스럽게 점점 높아지더라고요."(김)

<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