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강지원 김영란의 삶/부부 인터뷰

강지원-김영란, 이 부부가 사는 법

미디어다음   2004.8.29(일) 12:42

강지원-김영란, 이 부부가 사는 법
미디어다음 / 구자홍 기자
“요즘은 김영란 대법관 남편 강지원으로 더 많이 불려요. 자꾸 들어서 그런지 자연스럽기도 하고. 나름대로 좋은 일 아니에요”. 강지원(55) 변호사.
“한없이 고맙죠. 그 마음 씀씀이에…. (대법관 직무에) 더 충실해야겠다는 각오도 하게 되고요.” 김영란(48) 대법관.
강지원-김영란 부부와의 대화는 강지원 변호사의 ‘외조’를 화두로 시작됐다. 강 변호사는 부인 김영란 대법관이 임기를 시작한 8월25일, 부인이 소신껏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겠다며 ‘법무법인’ 대표를 사임하고, 시사프로그램 진행자도 그만두겠다고 선언, 화제를 뿌렸다.

“난 외조란 말을 쓴 일이 없는데, 언론에서 ‘외조’라고 하더라구요. ‘외조’든 ‘내조’든 여성 첫 대법관이란 소임에 충실할 수 있도록, 내 입장에서 뭔가 도울 일이 없을까 궁리 끝에 내린 결정이에요. 꼭 드러내놓고 할 일은 아니었는데, 뜻하지 않게 유명세를 타게 됐네요.”

소탈한 외모에 다소 직설적인 어법이 트레이드마크인 강지원 변호사는 세간의 평가 그대로 시종일관 솔직담백하게 말을 이어갔다.

경기도 분당 강지원-김영란 부부의 자택에서 이뤄진 인터뷰는 8월26일 저녁 8시에 시작돼 10시가 넘도록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시종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

여성, 청소년 문제 등 공익사건은 계속 맡을 것
ⓒ미디어다음 정재윤
- 남편이 아내의 앞길을 위해 기득권을 포기한다는 것,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은데요.
▲ 강지원 변호사 : 법관은 공정성이 생명이에요. 대법관이란 중책을 맡았는데, 나로 인해 오해가 생겨서는 안되겠다고 판단한 거죠. 법무법인 대표를 관두기로 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어요.

또 판사는 정치적 편향이 있다는 오해를 받아서도 안돼요. 정치적 중립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시사프로그램이라는 것이 대부분 정치를 다루게 되잖아요. 불필요한 오해가 빚어질 수도 있고 해서 그만두기로 했죠. 9월 가을개편 때 그만두게 될 겁니다.

- 주요 직책 두 가지를 포기하셨는데, 그럼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되나요.

일을 전혀 안하겠다는 것은 아닌데…. 너무 (보도가) 앞질러 나간 것 같아요. 당분간은 고문변호사로 후배들 지도해야죠. 그동안 해왔던 여성과 청소년 문제 같은 공익사건은 손을 놓을 수가 없구요. 법률공부를 한 사람은 억울한 사람을 돕는 것이 의무라고 봐요. 인간적인 욕심이나 관심은 어느 정도 포기해야죠.

- 청소년 지킴이, 청소년 수호천사란 닉네임이 따라 다니는데, 언제부터 청소년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나요.

초임 검사시절, 소년담당 검사를 했어요. 비행청소년 관련 사건을 주로 다뤘는데, 그때 비행청소년하면 원래 비뚤어진 아이려니 하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막상 만나보니 그렇지 않더라구요. 잘못된 선입견으로 청소년 문제를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하게 된거죠. 본격적으로 청소년 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은 89년에 서울보호관찰소장에 부임하고 부터죠.

애초 인터뷰 요청 취지가 ‘아내 위해 외조 나선 남편, 이 부부가 사는 법’이었는데, 너무 딱딱한 얘기로 대화가 흐르고 말았다. 음료수를 한모금 들이키고, 화제를 바꿨다.

- 흠흠.. 집이 참 아늑하네요. 언제부터 여기에 사셨나요?

김영란 대법관 : 14년 됐어요. 처음 분당에서 아파트 분양할 때, 그때 청약해서 당첨됐죠. 당시 처지에서는 좀 큰 집에 청약했었죠. 시부모님도 모시고 살고 해서, 꼭대기층에 복층이라 경쟁률도 높지 않아 청약했더니 운좋게 당첨됐어요. 그 전에는 변변한 집을 가져볼 엄두를 못냈죠.

지금도 자기(김영란 대법관)가 청약했다고 이집에 살게 된 게 자기 덕이라고 주장하죠.

경기 분당에 위치한 강지원-김영란 부부의 집은 복층식 아파트였다. 14년째 살고 있는 터라 얼마 전에 집을 손봤다고 한다. 한지를 벽지로 사용했는데, 아파트라기보다는 아늑하고 따뜻한 한옥 느낌이 드는 집이었다.

큰딸, ‘대학 안가겠다’, 수능 거부 선언으로 난감
집에 얽힌 얘기를 잠시 나눈 뒤, 자녀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강지원-김영란 부부는 슬하에 2녀를 두고 있다. 두 자녀가 모두 대안학교에 다녔다는 사실도 인구에 회자되곤 했다.

- 두 자녀가 모두 대안학교에 입학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첫째 아이는 전남 담양에 있는 ‘한빛고’를 다녔어요. 대안 특성화고등학교인데, 전인교육과 인성교육을 표방하는 학교에요. 둘째아이는 지금 분당에 있는 이우(以友)고등학교에 다녀요. 우리 부부가 설립자의 한사람으로 참여한 대안학교죠.

- 자녀를 대안학교에 보내는 일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큰 아이는 중학교 졸업하고 처음엔 분당에 있는 고등학교에 잠시 다녔죠. 몇 달 다니더니 다니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너무 획일적인 교육이라며…, 개성도 존중해주지 않고…. 그래서 엄마가 평소 봐두었던 대안학교를 함께 찾아갔고, 스스로 다니겠다고 해서 입학하게 됐죠.

- 대안학교는 별 탈없이 잘 다녔나요.

잘 다녔죠. 잘 다녔는데…, 고3이 돼서 대학에 안가겠다고, 수능을 거부했죠.

두 자녀를 대안학교에 보낸 부부의 얘기는 흥미진진했다. 이젠 옛 얘기가 됐지만, ‘수능을 거부한 일이며, 대학 진학을 포기한 일, 그리고 스스로 유학을 준비해 떠난 얘기 등’ 그간 자녀교육과 관련해 어떤 어려움이 있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을만했다.
첫째 아이는 고3이 되던 해, ‘대학진학을 않겠다’는 폭탄선언을 했다고 한다. 수능을 거부한 것. 부부는 ‘참 난감했다’고 회고했다. 그렇지만 부부는 ‘아이의 뜻’을 존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쨌든 본인의 뜻이 그러한데, 강제로 입시준비를 시킬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학부모가 입시교육 노예서 먼저 벗어나야
ⓒ미디어다음 정재윤
“고교 졸업 후에는 잠시 놀았어요. 그러더니 영어학원에 다니겠다며 다녔죠. 영어학원 몇 달 다니더니 유학 가겠다고 토플공부도 하고, 스스로 유학 준비를 해서 미국에 갔죠. 지금은 대학 3학년이에요” 김영란 대법관이 큰 아이 얘기를 하는 동안, 강지원 변호사가 말을 받았다.

“자녀를 키우면서 ‘공부해라’ ‘대학가라’ ‘미국가라’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스스로 알아서 판단하고, 알아서 결정할 수 있도록 옆에서 지켜봤죠. 수능 거부하고 대학 안가겠다고 할 때는 놀라기도 했지만, 존중해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어요. 우리 부부가 전형적인 엘리트 교육을 받아온 것 부인하지 않습니다. 우리 부부가 살아왔던 출세 지향적이고 획일적인 교육에 대한 반성의 의미도 있고, 또 회의가 들기도 하고…. 우리 2세들에게, 자라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그런 잘못된 교육을 답습케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타고난 개성을 맘껏 발휘케 하는 것이 참된 교육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거죠.”

다시 김영란 대법관이 말을 받았다.

“대안학교는 소박한 학교에요. 봉사 체험하고, 옷 만들어 입고, 문화 역사 탐방 많이 하고, 동아리 활동도 열심히 하고, 또 감자도 길러먹고…. 일반학교가 너무 입시위주로 운영되다보니, 평범한 학교가 오히려 덜 평범한 학교로 역전환된 것 같아요.”

“자녀에게 입시교육을 포기한다는 것,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에요. 가보지 않은 길을 간다는 것은 모든 것이 실험 상황에 놓여 있는 거잖아요. 공교육이 입시위주로 진행되는 것은 부모 영향이 적지 않습니다. 부모가 먼저 변하면, 공교육 정상화에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부모가 입시노예인 경우가 많아요, 학부모가 입시교육에 몰입해 있어, 공교육 정상화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지요. 요즘 청소년 문제로 강연할 기회가 많은데, ‘자녀는 자녀대로 자기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는 취지로 강연을 해요. 그러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여요. 그런데 막상 강연 끝나고 ‘그렇게 할거냐, 자녀가 대학입시 포기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거냐’고 물으면 ‘어떻게 입시를 포기하느냐’며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요. 결국, 부모가 먼저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참 많이 해요.”

대법관 임명제청으로 유학중인 딸 이사 못 도와줘
- 대안학교에 다녔고, 수능도 포기하고 스스로 유학의 길을 택한 자녀들인데.. 지금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나요.

아이들도 불안해하지요. 가보지 않은 길을 걷고 있으니까요.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 셈인데, 아이들 스스로 어려운 길 가도록 내버려 둔 것에 대한 불만도 있을 수 있겠죠. 그렇지만, 부모 입장에서도 그런 결정 내린다는 것…. 참 어려운 일이었어요.

뭐든 원하는 대로 우선 해봐라. 그렇게 허용했지. 오히려 지금은 자율성이 더 많아요. 독립심도 생기고, 훨씬 강해지는 것 같아요.

한참 자녀 얘기로 이야기꽃을 피우던 중에 부부는 갑자기 ‘아 맞아!’하며 한가지 에피소드를 생각해냈다.

“지금 미국에 유학 가 있는 큰 애가 대학 3학년인데, 얼마 전에 이사를 했어요. 혼자서 이사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 엄마가 도와주려고 휴가도 내고, 비행기표도 구해놨었는데…, 갑자기 그때 대법관 임명 얘기가 나온 거예요. 아마 (해외에) 나가려던 날짜에 청문회 일정이 잡혔을 거예요. 그래서 급히 다 취소하고…. 나중에 아이가 전화해서는 ‘이사 잘했다’며 ‘조립하는 침대를 사서 2시간 동안 조립했다’고 자랑을 하더군요. 대견하기도 하고…, 못 도와줘서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혼자서 씩씩하게 외국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큰 아이 얘기를 하면서 부부는 마냥 대견스러운 모양이었다. 강지원-김영란 부부는 딸만 둘을 가진 부모다. 시부모를 모시고 오랫동안 살았는데, 옛 어른들의 고전적인 레퍼토리가 궁금해졌다. ‘아들 하나 더 낳을 생각 없수?’

열심히 싸워라, 그리고 열심히 풀어라
- 시부모님도 함께 계셨는데, 아들 낳으란 얘기를 듣진 않았나요?

부모님은 애착이 있으셨죠. 아들 하나 더 낳아라. 그런데 난 꼭 아들이 필요하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딸이 둘이면, 자식이 둘 있는 건데…. 지금 돌이켜보면, 아들 낳지 않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어요.

직장이 바빠, 원했어도 도리가 없었죠.


- 시부모님을 계속해서 모시고 살았는데, 강 변호사는 장남인가요?

삼남이에요. 외국에 사는 형제도 있고 해서 신혼 때부터 부모님과 함께 살았는데, 처음에는 한 1년 정도 예상했어요. 1년 뒤 해방되리란 기대도 했지, 그런데 여건이.. 그러다 계속 같이 모시고 살게 됐죠.

- 아무래도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다보면, 부부간에 갈등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부부싸움은 안하셨나요?

많이 했지. 신혼 때는…. 서로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를 놓고 많이 싸웠죠. 지금 생각해보면 어려서 그렇게 싸웠나봐.


시부모를 모실 거냐, 아니냐를 떠나서, 며느리 입장을 배려해줬으면 하는 생각이었죠. 특히 시부모를 모시고 있는 며느리의 마음을 두고 진정성을 의심받거나 하면…. 그런 점이 참 많이 힘들었죠. 서로 다른 집안에서 자라 결혼으로 한 가정을 꾸리다보면, 그런 싸우는 과정을 통해 더 많이 이해하게 되는 것 같아요. 상대방 입장을 이해하는 폭이 커진다고나 할까요.

인간에게는 본능적으로 지배에 대한 욕구가 있어요. 권력에 대한 욕구와 같은 것이죠. 그런데 부부 사이에는 그런 욕구를 포기하는 연습을 자꾸 해야 돼요. 젊었을 때는 자아감이 강해서 잘 안 되긴 하는데, 나이가 들면 차차 그게 돼.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은 스스로 지배 욕구를 포기하는데서 오거든요.

- 검사와 판사 부부였는데, 부부싸움 할 때는 어떻게 싸우셨어요?

TV 법정 드라마처럼 싸우지 않느냐는 얘기를 많이 들었지.


애들도 친구들이 궁금해 한다고 그래요. ‘당신의 그 말과 행동은 형법 제 몇조에 해당되는 얘기로…’, 뭐 이런 식으로 싸우지 않느냐는 얘기들이었는데…. 법조문 들먹이며 싸우는 것은 아니고요, 성격이 잘 따지는 편이어서, 아무래도 논리적으로 싸우는 편이었죠. 집안일 갖고 싸우는데,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되는 부분이 많아요. 피차간에.

- 부부싸움을 하고 나면, 한동안 대화를 잘 안하게 되는데, 누가 먼저 화해를 제의했나요.

서로 자기가 먼저 풀었다고 주장하는데, 내가 빨리 풀어졌지.


내가 빨리 풀어졌는데….


부부싸움은 정답을 찾으려고 하면 안돼요. 그냥 서로가 그렇게 각자 맞다고 생각하는 것도 좋아요.. 판결이 아니니까.. 각자 옳다고 믿으면 되는 거죠…. 다만 서로가 옳을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해야지, 그 정도 배려가 있어야죠.

신혼 때는 왜 나를 자기 틀 속에 맞추려 하나, 나는 내 틀이 있는데, 내 틀대로 살아가는데…. 그런 생각이 많았어요. 그런데 살다보니, 각자 틀을 알게 되고, 존중하게 되더군요. 그렇게 되면서부터 같이 사는 게 편해졌어요. 고민을 넘기니까 상대방을 이해하게 되구요, 어느 사이엔가.

나는 주례를 설때도, ‘열심히 싸워라, 그리고 열심히 풀어라, 그러면서 부부가 함께 살아가는 기술을 익혀라’라고 얘기해요.. 싸우면서 배우는 것도 있거든.

덕수궁 뒤에서 간첩 접선하듯 만난 연애시절
부부싸움 얘기를 한참 나누다보니, 연애시절 얘기가 궁금해졌다.
강지원-김영란 부부는 강 변호사가 서울지검 검사 시절, 옆방 검사시보로 근무하던 김 대법관을 만나, 1년여간 열애 끝에 결혼에 골인했다고 한다.


- 두분은 어떻게 결혼하게 되셨나요? 강 변호사께서 첫눈에 반했다고 하던데요.

처음 봤을 때, 참 선하다는 인상을 받았지. 그래서 ‘찜’해놓고 점심 사준다고 자꾸 불러내서 꼬셨지. 아마 몰랐을 거야. 처음에는…. 처음엔 동기생들이랑 같이 와라, 그러다가 차츰 혼자 보기도 하고, 죽 관찰을 했지. 진짜 선한 사람인가…. 나중에는 덕수궁 뒤에 성공회가 있었는데, 그 벤치에서 자주 봤어. 보는 눈이 많아서, 무슨 간첩 접선하듯이 만나곤 했지, 주로 내가 김 판사를 찾는 편이었어요. 그런데 말이에요, 김 판사는 나를 먼저 알았다고 하더라구.

법원시보 때, 법원 사무실로 당시 강 검사가 인사를 하러 와서 처음 봤어요. 사법고시 준비할 때도 수석 합격기를 읽으며 공부하기도 했고, 신문기사를 통해 소식을 듣기도 하고…, 또 고시잡지에 강 검사가 썼던 답안을 보면서 공부하기도 했어요. 나는 먼저 알고 있었지요. 검찰시보 할 때가 연말연시쯤 되는데, 그때 ‘밥 사준다’고 해서 자주 만났던 것 같아요.

- 덕수궁 돌담길도 옆에 있었는데, 그쪽에서는 데이트를 안했나보죠.

법원 앞이라 보는 눈이 많아서, 그쪽으론 잘 안갔지, 왜 그런 얘기도 있잖아요. 돌담길 함께 걸으면 헤어진다고..


주로 성공회 사무실 벤치에서 많이 봤어요. 그 부근 변호사 사무실에서 제가 변호사 시보를 하고 있었거든요.


얘기는 자연스레 결혼 얘기로 이어졌다.

- 신혼여행은 어디로 다녀오셨어요?

제주도로 다녀왔어요.


그때만 해도 공무원들이 해외에 나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때였어요.


신혼여행가서 깜짝 놀란 일이 있어요. 제주도 도착해서 숙소에서 TV를 보는데, 아 글쎄 우리 결혼식 장면이 나오는 거야. 그것도 9시 뉴스에…. 깜짝 놀랐죠.

그때만 해도 여판사가 몇 명 없던 때라 검사와 결혼한다고 화제가 됐었나 봐요. 요즘이야 별 얘깃거리도 안 되겠지만, 그때만 해도 드문 일이었거든요.

너무 잘하려 하기보단, 기본에 충실해야 오래 가
1982년 결혼식 폐백을 드리고...
- 벌써 결혼한 지 20년이 더 되셨네요. 그동안 여성판사로, 며느리로, 아내로, 두 아이의 어머니로 1인 4역을 해오기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힘들었죠. 힘들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 될테고요. 저는 매사 너무 잘하려고 하지 않는 편이에요. 너무 잘하려고 하면 더 못하게 되거든요. 너무 잘하려 하지 않는 대신, 기본을 충실히 하려고 하는 것이 오래가는 비결인 것 같아요. 모든 일이 다 그런 것 같아요. 집안일도 너무 잘하려고 하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기 어렵잖아요. 더군다나 (판사라는) 직업이 그리 호락호락한 일도 아니었고. 그래서 집안이 조금 희생이 됐죠. 집안일이 희생된 점이 많아요.

희생은 무슨. 다 맞벌이를 하다보면, 형편에 맞게 하는 거지.


- 남편께서 많이 도와주셨나요. 또 판사 재직하면서 지방 근무도 적잖게 하셨는데요, 그때는 어떠셨어요.

(남편을 한번 쳐다보더니) 도와줬죠. 설거지 정도. 아무래도 시부모님도 계시고 해서….


설거지는 내가 빨리하지. 그리고 왜, 김 판사가 부산에 있을 때는 내가 한 주도 빼놓지 않고 매주 내려갔었잖아.

강지원 변호사는 자신의 속옷에서부터 겉옷까지 직접 챙겨 입는다고 한다. 별도로 옷장을 갖고 있는데, 옷을 배열해 넣는 것에서부터 꺼내 입는 것까지 모두 직접 챙겨서 한다고 한다.

“언젠가 동료 판사가 부인 얘기를 한 일이 있어요. 아침마다 속옷에서부터 넥타이까지 입을 옷을 모두 챙겨준다고요. 그 얘기를 들으니, 뭐랄까 미안한 마음이 들더라구요. 신혼부터 지금까지 옷을 챙겨 준 적이 없거든요.”

“자기 입을 옷 자기가 챙겨 입는 것이 자연스러운 아닌가. 나는 옷장에 옷을 넣는 것도 그렇고 꺼내 입는 것도 그렇고 모두 내가 직접 해요. 또 그게 제일 편해. 내 스타일대로 입을 수 있잖아.”

여성 최초의 대법관이란 수식어 뒤엔 전통적 부부관에 얽매이지 않은 ‘강지원 변호사’의 숨은 내조가 적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20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온 두 부부. 이 부부가 티격태격하면서도 알콩달콩 살아왔을 지난 20년의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가는 듯 했다. 그동안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성과를 내면서도 금슬 좋은 부부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 한편으론 부럽기도 했다. 그 비결이 뭐였을까. 갑자기 가훈이 궁금해졌다.

- 가훈이 뭔가요?

화락당(和樂堂)입니다.. 평화롭고 즐거운 집. 그런 집이 되자는 뜻이지요. 선친때부터 가훈으로 삼아왔습니다.

화락당(和樂堂)이라! 그래서 그런지 집안 분위기가 차분하면서도 평화로와 보였다. 각종 벽을 장식하고 있는 가족 사진들과, 기념패들은 가정의 즐거움을 웅변하고 있는 듯 했다. 이제 얘기도 어느덧 중반을 넘기고 있었다. 기분 전환도 할 겸, 시간을 거슬러 부부의 청소년기 시절로 돌아가 보았다.

노래부르기 좋아하던 강 변호사, 40년만에 무대 데뷔
- 두분 다 법조인의 길을 걸어오셨는데, 청소년기를 어떻게 보내셨는지 궁금합니다.

문학을 좋아하는 문학소년이었지. 백일장에 나가 장원도 하고. 김 판사도 문학소녀이었다죠.


저도 교내(경기여고) 백일장에선 장원도 하고 그랬어요. 강 검사처럼 서울사대 백일장에서 장원은 못해봤지만….


어렸을 때는 개구쟁이였어요, 중학교 땐 내가 방송반장을 했다고 그래요. 내가 방송을 꽤 오래 했는데, 방송을 하면서 익숙한 느낌이 들었어요. 왜 그런가 했더니, 그래도 어렸을 적 해본 가락이 있어서 그랬나봐. … 노래 부르기도 참 좋아했지. 참, 구기자. 내가 얼마 있다가 노래를 불러요. 오늘 처음 얘기하는 것 같은데. 어렸을 적 좋아했던 노래를 40년이 지나서 무대 위에서 부르게 됐으니, 꿈을 이룬 셈인가. 하하.

어릴 적 노래부르기를 좋아했던 강지원 변호는 곧 공식 무대 데뷔를 앞두고 있다. 오는 9월13일 예술의 전당 무대에 설 예정이란다. 한국-이태리 수교 120주년을 기념하는 ‘기념음악회’에 ‘명사 초청’ 코너에 출연, 2곡의 성악을 부를 예정이라고. 이 무대를 위해 강 변호사는 지난 2월부터 매주 레슨을 받아오고 있다고 한다.

“청소년기가 참 중요해. 나이를 먹을수록 더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때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열심히 해야 돼요. 사회 고정관념에 억눌려서 자신을 희생하면 안돼요. 나는 청소년들에게 ‘자기를 찾으라’고 강조하곤 해요. 청소년기는 복합적인 탤런트가 형성되는 아주 중요한 시기거든요. 내 경우도 어려서 노래 부르기 좋아했던 점을 살렸으면, 성악가가 됐거나, 아니면 성악이 인생의 중요한 부분이 됐겠죠. 아니면 성악을 통해 청소년을 지도할 수 있는 재능을 발달시켰을 수도 있었을 테고….”

법조인의 길, 운명같은 것….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그리움은 남아
1995년 대법원 이전 전, 가족들과 함께...
- 김 대법관께서는 법관이 안됐으면 무엇을 하셨을까요.

글쎄요.. 독문과에 입학해서 문학평론가가 되지 않았을까요. 문학을 좋아하고 문학 서적이나 비평을 보는 것을 좋아했거든요. 대학에 입학할 때도 사회계열보다는 인문계열로 가고 싶었어요. 대학에 입학해서 몇 년 동안 방황을 했죠. 문학을 하고 싶다는 열망에.. 그때 한 선배가 고시 잡지를 주면서 공부를 권하더라구요.. 거기에 강 검사의 ‘수석 합격기’가 실려 있었고요.

지금 생각해도 사이 사이에 아쉬움은 남지만, 결과적으로 제 운명은 법조인의 길을 가도록 운명 지어 지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도 아쉬움은 있죠. 왜 그런 것 있잖아요.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 같은 것…. 인간에겐 누구나 여러 가지 재능이 있죠. 좋아하는 일을 마음껏 하다보면, 여러 재능이 조화를 이루고, 인생이라는 하나의 작품이 만들지는 게 아닐까요. 제 경우에는 예술적인 면에 재능이 있었다기보다는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좋아해서 법학과 잘 맞았던 것 같아요. 또 성격적으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편이구요..

- 강 변호사는 어떻게 법조인의 길을 걷게 되셨나요.

그때가 언젠가, 문리대에서 3선 개헌 반대 데모를 하다가 학교에서 무기정학을 당한 일이 있어요. 그때 경찰에 ?겨 ‘백양사’로 피신했죠. 그때만 해도 ‘사’자가 들어가는 직업을 최고로 치던 시절이었는데, ‘백양사’에서 고시 공부를 시작했지. 처음엔 행시에 합격해서 재무부, 관세청에 근무했고, 몇 년 주경야독한 뒤에 사시에 합격했지. 적성에 맞는지 아닌지 따져볼 겨를도 없이 사회 관념에 따라 이 길로 들어선 셈이죠. 요즘 젊은이들은 우리 때와는 많이 다르죠. 사회 통념,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말라는 얘기를 해주고 싶어요. 청소년기에 참된 소망이 무엇인지,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탐구해봐야지요.

- 시위로 무기정학 이력이 있었는지는 처음 알았네요. 그건 그렇고 강 변호사는 사법시험을 수석합격 하셨잖아요, 검찰에서 승승장구하셨을 것도 같은데….

고민이 많았죠. 사회통념대로 ‘사’자가 들어가는 직업을 갖기는 했는데, 독재정권 시절이었잖아…. 가급적 정치사건을 피하려고 몸부림쳤지. 당시 출세의 지름길이라는 공안부 검사로 1년 남짓 있다가 싸우고 나왔지. 출세라는 것…. 그건 일시적인 것 같아, 물거품 같은 것이지. 참된 성공이 뭘까. 돈? 권력? 지위? 명성? 그런 것들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자신이 하고픈 일을 찾아 열심히 하는 것. 그리고 스스로 만족하면서 살고, 더 나가서 이웃에게 보탬이 된다면 그 이상 무얼 바랄까. 너무 세속적 출세욕에 빠져있으면 추해져. 청소년 사업하면서 그점을 깨달았지.

행복은 출세나 명예처럼 밖에서 찾으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 같아요. 밖에서 뭔가를 찾으려고 하면 진정한 행복은 깨닫지도 못하고 누리지도 못하는 것 같아요. 조그만 것에서부터, 자기 나름댈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을 찾아내야죠. 행복의 기준을 밖에 두고 찾으려 하면 끝없이 뭔가를 추구하게 돼요. 그러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죠.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는 것이 교육인 것 같아요.

스스로 자기 자신이 하고픈 일을 할 때, 비로소 남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것 같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대화가 계속되는 동안 얘기는 어느덧 인생관에 대한 열띤 토론장으로 변해 있었다.

“김 판사가 대법관이 된 것은 개인적으로는 뜻하지 않은 행운이요, 영광이지. 그렇지만 많은 고통 받는 여성들에게는 하나의 희망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용기를 심어줄 수 있는 일이지. 여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여성들에게) 자포자기 하지 말고, 스스로 한계를 뛰어넘는 용기를 심어줬으면 하고 바래….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 때 남도 사랑할 수 있거든. 내가 청소년 사업을 하면서 아무도 돌보지 않는 비행청소년을 만나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얘기를 듣다보면, 내 스스로 우러나오는 마음이 생겨. 그리고 어느 정도 충족감도 생기지. 그러다 보니 소외된 사람, 고통받는 사람, 소수자에게 관심을 자꾸만 갖게 돼…. 처음부터 남을 위한 삶을 살 수는 없겠지만, 스스로 만족하고 충족감이 생기면 남에 대한 이해와 배려의 마음이 더 커지는 것 같아. 부족하지만 더 힘들어하고 고통 받는 사람을 위해 뭘 할 수 있을까. 판사는 판결로, 직업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겠지.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할 수 있어야 돼.”

강 변호사가 인생관이랄까, 가치관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동안, 김 대법관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를 사랑하고, 스스로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 남에 대한 배려가 넓어졌다’. 강 변호사가 잘 나가던 검사에서 ‘청소년 지킴이’로 변모하는 과정에 김 대법관의 ‘조언’과 ‘내조’도 적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다소 숙연해진 분위기를 바꿀 겸 가벼운 주제로 화제를 돌렸다.

김 대법관, ‘파리의 연인’ 재밌게 봐
- 두 분은 여가시간에 주로 어떻게 보내세요.

주로 책을 읽는 편이에요. 저나 남편이나 잡기엔 영 소질이 없거든요.


우리 부부는 워크홀릭에 가까운 편이에요.


- TV도 안보시나요?

나는 방송 준비 때문에 볼 시간이 별로 없지. 워낙 이른 새벽에 나가야 하니까,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거든.


전 드라마를 즐겨 보는 편이에요. 최근에는 ‘파리의 연인’을 재밌게 봤어요. 딸아이가 뻔한 신데렐라 스토리가 뭐가 재밌냐고 핀잔을 주곤 했는데…. 그래도 재밌게 봤어요. 똑같은 얘기도 어떻게 전개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연기자들이 연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재미가 달라지거든요. 요즘 젊은이들의 대사도 재밌던데요.

- 집이 검소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TV도 그렇고….

검소하게 사는 게 좋아요.


강 검사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사치하거나 치장하는 것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저 TV도 꽤 됐지, 아마. 원래 있던 것이 한 20년 쓰니까 브라운관이 나가서 바꾼 건데. TV는 잘 나오면 되는거지 뭐.


- 지난번 재산공개 하신 걸 보니 김 대법관께서는 의외로 부채가 많은 걸로 돼 있던데요.

그건 올 초에 어머니가 돌아 가셨을때…, 이래저래 들어가는 돈이 많아서….


급한 돈을 마이너스 통장으로 꺼내 쓰다보니까, 그렇게 됐어요. 대법관에 임명되고 보니, 어찌됐건 ‘부채’가 많은 것도 부담스럽더군요.


지난 3월 강지원 변호사의 모친이 돌아가셨다. 그때 강지원-김영란 부부는 ‘장례문화 개선’에 대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체 외부에 ‘부고’를 하지 않고 조용히 장례식을 치렀다. 외부의 도움 없이 장례를 치르다보니, 예상치 못한 부채가 발생한 것이었다.

- 가족들하고 여행은 자주 다니십니까.

그래도 짬짬이 다니려고 노력하죠. 딸 아이 외국 나가기 전에는 제주도도 함께 갔다 왔고….


백양사도 다녀왔죠. 고시공부하던 곳이라고 한번 가보고 싶다고 해서. 그때가 검사를 그만 둘 때였죠. 2002년엔가. … 그리고 아이들하고 일본 배낭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어요. 헌 책방이며, 만화가게, 중고 CD가게를 돌아다녔죠. 젊은이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도 가보고…. 아이들과 함께 한 여행이어서 그랬는지, 재밌었어요.

- 강 변호사는 아이들에게 어떤 아버지인가요.

개성을 존중해주는 아버지죠. 이해해 주는 편이고….


나만 빼고 집안에 죄다 여자들이어서, 집안에선 내가 왕따에요.. 하하.


자기 안의 당파심 개혁이 진정한 개혁
- 강 변호사는 1년째 시사프로그램을 진행해오셨는데, 소감이 어떠세요.

원래 따뜻하고 편한 인터뷰를 추구 했는데, 어땠는지 모르겠어요. 방송하면서 참 많은 걸 느꼈죠. 우리나라 사람들 당파심이 너무 심한 것 같아요. 정치인들 개혁, 개혁하는데, 진정한 개혁은 자기 안에 있는 당파심을 개혁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스스로 당파심에 빠져 있지는 않나, 스스로 성찰하는 것이 진정한 개혁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상대방의 개혁을 요구하는 얘기뿐이에요. 자기 성찰이 없는 거죠. 과거 조선시대 사색당쟁이 있었잖아요. 난 지금이 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그것을 고치지 않으면 우리나라가 침몰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어요.

시사프로그램 진행자로 1년여 정치권과 사회 전반의 분위기를 접한 강지원 변호사는 ‘자기 성찰, 내안의 당파성을 개혁하는 것’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덧 시간은 10시를 넘기고 있었다. 8시에 인터뷰를 시작했으니, 당초 약속했던 1시간의 두배가 넘는 시간동안 인터뷰가 진행된 셈이다. 슬슬 인터뷰를 정리해야 할 때가 왔다.

두 부부에게 인터뷰를 마치며 마지막으로 던졌던 질문은 ‘인생의 좌우명’이 뭐냐는 거였다. 강지원 변호사는 ‘신독(愼獨)’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고 했다. ‘홀로 있을때 삼간다’. 개인의 내면적 충실함을 강조한 유교의 덕목 가운데 하나다.

강지원 변호사에게 ‘신독(愼獨)’이란 좌우명은 썩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그런 좌우명에서 대법관 아내를 위해 ‘대표 변호사 사퇴’ ‘시사프로그램 진행자 사퇴’라는 결단이 나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