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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원 김영란의 삶/부부 인터뷰

이웃들이 더 잘 사는 세상을 만드는 데 보탬이 되고 싶다(2)

LADY 그렇다면 강 변호사님은 위원장 역할에 도움을 많이 주셔야 하겠어요. 김 위원장님이 수많은 '' 기록을 보유하고 있지만, 독립관청의 기관장 역할은 처음이라 어려운 점이 있으실 것 같은데 어떠신가요?
김영란


국민권익위원회에 접수되는 민원은 행정부에서의 일반적인 고충처리 업무로는 해결되지 않는, 어려운 문제가 많아요. 그것을 공정하고 명쾌하게 해결하기란 쉽지가 않죠. 하지만 적어도 민원인이 '억울하다'는 마음을 갖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그 마음까지 보듬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 예전에 비해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부패 수준은 아직 심각한 편이에요. 눈에 드러나는 '하드 케이스'는 줄어들었지만 보이지 않는 구조적 부패는 여전하거든요. 특히 이런 쪽은 단시간에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문화적 변화 또한 함께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에 제도에 의한 획기적인 개선을 꾀하기보다 서서히 토대를 닦아나가려 하고 있어요.




강지원

아무래도 김 위원장은 사법부에서 오래 일하던 사람이라 다른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어려운 점이 있을 거예요. 아예 문화가 다르니까요. 제가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잘해낼까' 걱정해주는 것 정도죠. 그래도 제가 사회활동하면서 겪은 이야기나 경험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해서 그런 부분이라도 열심히 도우려고 해요.

LADY
얼마 전, 김 위원장님의 부친상 소식이 뒤늦게 알려지며 '공직자의 귀감'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셨죠. 해외 출장 중 비보를 접하고도 공무를 끝마치고 나서야 빈소를 찾으셨다면서요. 심지어 주변에 알리지도 않은 채 장례를 치렀다고 하던데요(부부는 가족과 권익위원회에 외부로 소식을 알리지 말라는 요청과 함께 장례식장 입구에 공개된 상주 명단에서도 이름을 뺐다고 한다. 출장에 동행했던 대부분의 직원들과 지인들조차 이 사실을 몰랐을 정도. 김 위원장은 회의 및 면담 자리에서는 슬픔을 내색하지 않은 채 최대한 담담히 모든 일정을 소화한 뒤 귀국하자마자 곧바로 빈소로 달려가 마지막 밤을 지켰다. 이 부부는 2004년 강지원 변호사 모친상 때도 가족들끼리만 간소하게 장례를 치른 바 있다).
김영란


위원회 업무로 미국에 머물고 있던 중 연락을 받았어요. 국가 업무를 수행하러 간 상황에서 개인적인 일로 약속된 회담을 취소할 수는 없어서 그렇게 했어요. 주변에 알리지 말라고 했던 것도 어차피 저는 미국에 있어서 문상객을 맞을 형편도 못 됐거니와 평소에 남편과 저는 그런 혼·상례에 있어서는 가까운 사람들 중심으로 간소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왔거든요. 신분이 공직자이기도 하고요. 언니나 동생, 형부 등 다른 가족들도 흔쾌히 동의해줘서 저희 뜻대로 할 수 있었죠.

강지원

2001
년이었나, 지나치게 체면을 앞세운 우리 혼·상례 문화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나온 '아름다운 혼·상례를 위한 사회지도층 100인 선언'이라는 게 있었어요. 그때 그 운동에 참여하면서 공감을 많이 했거든요. 그래서 실천으로 옮기기고 있는 것뿐이에요.

김영란

정말 조용히 치르고 싶었는데, 발인하는 날에 위원회 국회 출석 일정이 잡혀서 저 대신 다른 분이 가시는 바람에 알려지게 됐어요. 이렇게까지 회자될 거라곤 정말 생각도 못 했어요. 알리지 말자고 했던 게 오히려 더 알려져버려서 굉장히 난감하네요.

강지원

경조사 때 사람이 많이 몰리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문화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지위를 이용해 괜히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도 않았고요. 장례를 치르는 동안에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수의에는 호주머니가 없더군요. 돈이든 명예든 권력이든, 가는 길에는 내려놓고 떠나잖아요. 마음 아픈 일에 자식들이 괜히 '떵떵거리는' 모습을 보이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에요.

'
다름'에 대한 인정


30
년 가까이 법조인의 길을 걸어온 두 사람은, 같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궤적을 그려왔다. 지금보다 훨씬 적은 수의 합격자를 뽑던 그 시절 사법고시 수석 합격을 차지하며 검사생활을 시작한 강지원 변호사는 사법연수원 교수, 청소년보호위원장,
법무연수원 교수, 푸르메재단 대표 등 수많은 직함을 가졌었다. 하지만 정작 모두가 예상했던 검사장, 지청장, 검찰총장 등을 맡아본 적은 없다. 만약 본인이 원했다면 쉽게 탄탄대로 출세의 길을 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기들이 대부분 승진해 소위 말하는 '잘나가는' 법조인으로 승승장구할 때 강 변호사는 요직을 뒤로하고 봉사의 기회가 주어지는 자리에만 머물러왔다. 방송에 출연하고 각종 사회 행사에 참여하는 것도 모두 '좋은 사회를 만들고 싶다'는 목표에 부합하는 선에서만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는 이 모든 것이 그의 신념을 믿고 묵묵히 지지해준 아내 덕분이었다고 말한다.

대법관 퇴임사에서 "법원은 제가 몸담은 유일한 직장이었고 사회였다. 그 중에서도 대법원은 재판연구관과 대법관으로 11년 일하며 법관생활의 4할 가까이를 보낸 곳이었다"라고 밝히며 남다른 애정을 드러낸 바 있는 김영란 위원장은 오랜 시간 동안 다른 데 눈 돌리지 않고 오직 한 방향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내내 우리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하고
소수자의 권리를 확대하는 데 법이 올바르게 쓰일 수 있도록 애썼다. 사실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사회 '주류'인 그녀가 그렇게 지속적으로 '소수'를 위해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한편으로는 그녀 또한 '소수자'인 여성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수식하는 각종 '최초의 여성'이라는 타이틀 앞에서 당당하고 의연해지기 위해 최선을 다해온 김 위원장은 소신껏 일에 전념할 수 있었던 데는 남편의 이해가 숨어 있었다고 말한다.



LADY 김 위원장님은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의 최초 여성 대법관으로 주목을 무척 많이 받았었는데요. 존재 자체로 상징하는 부분이 많았지요. 대법원을 떠나고 나서 아쉬운 점은 없었습니까?
김영란


제가 대법원에 들어가서 '여성'에 국한되기보다는 '소수자'의 입장에서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이념을 전파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뿌듯한 일이에요. 다만 아쉬운 점은 제 행보가 주목을 받고, 법조계는 물론 사회 각 분야에 여성 파워가 늘어나고 있다고는 하지만 성적으로 진출하는 분야를 제외하고는 아직까지 진정한 여성의 사회 진출은 답보 상태에 있다고 생각해요. 두드러진 몇몇 모습만 부각되면서 여성을 위한 사회적 장()이 펼쳐진 것처럼 착시 효과를 일으키게 될까봐 걱정이 되기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