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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원 생각 2 : "애타(愛他)의 삶?" /효사랑의 삶

[문화재사랑] 군주에게서 효를 배우다

[문화재사랑] 옛 군주에게서 효를 배우다 융릉, 건릉

글·김진희 | 사진·최재만  기자의 다른 포토보기


한恨과 효孝가 하나가 되는 곳 

완연한 봄기운을 받은 나무와 꽃들의 환영을 받으며 강지원 변호사는 오랜만에 융?건릉을 찾았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서울을 떠나야 한다고 외쳐왔다. 너무나 많은 사람, 너무나 많은 그 무언가들로 가득한 서울은 이제 자신의 무게를 지탱하기 어렵다고 말이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서울을 나왔다. 수원으로 거처를 옮긴 그는 그가 좋아하는 융릉?건릉을 자주 갈 수 있음에 기뻐했다. 

사적 206호로 지정된 융?건릉은 그 유명한 수원 화성을 찾는 답사객들에게 또 하나의 코스로 자리 잡고 있다. 새로운 신도시를 향한 정조의 열망을 수원 화성에서 찾아 볼 수 있다면, 정조의 지극한 효심은 융?건릉에서 찾아볼 수 있다. 평소 청소년과 사회의 다양한 약자들 편에 서는 것을 좋아하는 강지원 변호사는 ‘효’에서 가족학의 모티브도 받았다. 그리고 ‘효’를 세계적인 문화상품으로 만들 수 있다는 발전적인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한 그에게 융?건릉은 우리 옛 군주의 효심을 엿볼 수 있는 훌륭한 장소였다. 
오랜만에 흙을 밟으면서 옛 이야기 속으로 향하는 길은 분주한 오늘날의 이야기와는 달리 여유롭고 상쾌했다. 고요하게 난 외길을 따라 융릉에 도착하니 당파싸움의 희생자가 된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가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강지원 변호사는 28세의 젊은 나이에 뒤주에서 8일 만에 죽은 사도세자의 이야기와 사도세자의 능을 크게 축조하고 기렸던 정조의 효심 서려 있는 기가 막힌 이야기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 

강지원 변호사는 세계효문화재단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온 세계에 ‘효’와 관련된 이야기를 찾아보았지만 사도세자와 정조 같은 이야기를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다른 나라들보다 유난히 ‘효’와 관련된 이야기가 우리나라에 많았다. 착한 심성을 타고 난 우리네 민족성은 ‘효’와 너무나도 밀접한 문화들을 만들어 내며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현재 사회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효’에서 찾아내고 있었다. 융릉에 대해 경의를 표한 그는 이제 건릉으로 발걸음을 돌리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가득했던 정조는 죽어서도 아버지 어머니 곁에 함께 잠들어 있었다. 수년간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고 그 유품들을 자신의 살아생전에는 간직하고자 하는 강지원 변호사의 모습에서 정조의 모습이 보였다. 융릉보다 약간 규모가 작고 조금 덜 꾸며진 모습의 건릉이었지만 그는 융?건릉을 통해서 이 시대까지 ‘효’에 대한 깊은 생각을 던져주는 정조의 메시지에 한 번 더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불심과 효심이 하나가 되는 곳 

이제 그는 융?건릉에서 2km 정도를 가면 나오는 ‘용주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원래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에 창건 되었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정조가 아버지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았던 절이다. 석가탄신일을 기다리며 오색 빛의 찬란한 연등들이 바람소리를 따라 잔잔히 흔들리고 있는 용주사에 들어서니 많은 신도들이 그에게 합장을 하며 인사하기 시작했다. 불심과 효심의 어우러짐으로 유명한 용주사의 신도들은 이미 그가 어떻게 그의 부모를 섬겼는지 알고 있는 터였다. 그는 한 분 한 분과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며 그가 꿈꾸는 세상을 오늘의 자신에게 적용시키며 세상을 바꾸어 나가고 있었다. 


스님들의 불공 드리는 소리가 용주사 내에 조용히 퍼져 나가고 있을 때 쯤 그는 정조가 읽고 감명을 받았다는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면서 용주사의 그 맑은 공기 속에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평소 빗장을 닫아 두었던 용주사의 ‘범종’(국보 제120호) 도 오늘은 그 모습을 드러내며 그의 방문을 반겼다. 범종의 소리는 본래 중생의 마음속을 깊이 울려 어리석은 몸과 마음을 부처님의 품으로 이끌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용주사의 범종 소리가 이 분열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깊이 울리기를 기대했다. 용주사는 ‘효’와 관련된 많은 프로그램들도 진행이 되고 있었다. 그는 용주사가 그 지어진 목적처럼 ‘효’를 널리 알리는 절이 되기를 고대했다.


 

문화재와 우리가 하나가 되는 곳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서 융릉을 지었지만, 오늘날 정조의 메시지는 우리 모두를 향한다. 하지만 그는 이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우리들을 발견했다. 융?건릉의 능과 능을 눌러싼 숲과 너른 잔디들은 잘 꾸며져 있지만 정작 능에서 발견되어야 하는 진실 된 가치들이 그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다고. 그저 이곳에 나들이를 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이 문화재가 가진 가치들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세계 곳곳에 깊은 역사를 가진 문화재들이 무수히 많이 있다. 하지만 그 문화재들 가운데는 허구적인 이야기를 실제처럼 만들어 문화재로 만든 것도 있고, 실제 이야기를 담은 문화재들도 있다. 당연히 실제 존재한 이야기를 담은 문화재가 더 가치가 있겠지만 그 내용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문화재가 그 가치를 잃는 법이다. 그는 융?건릉과 그 이야기가 가진 가치들이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못하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이야기 하며 그 빛바랜 가치들에 새로운 빛이 더해지기를 바란다고 했다. 또한 당파에 휘말려 억울한 죽음을 당한 자신의 아버지를 보며 내놓은 ‘탕평책’이 사분오열된 이 시대에도 필요한 정치체제라고 하며 한 가정의 평화에서 나라의 평화에 이르는 그 유기적인 흐름들에 대해 이야기 했다. 또한 지도자들이 우리네의 아름다운 덕목들을 본을 보일 때 그 파장은 당대뿐만 아니라 세대를 넘어 그 가치들을 실천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사람들이 문화재를 찾는 데에는 다양한 목적들이 있다. 그는 문화재 자체의 가치를 통해 오래된 역사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교훈들을 되새겨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 한다. 이제 누구든 융?건릉을 찾아 간다면, 사도세자의 깊은 한恨과 정조의 효심을 꼭 만나고 오라며 강지원 변호사는 옛 여행길의 문을 나섰다.

강지원

현재 매니페스토실천본부 상임대표이자 청소년?여성?장애인들의 인권 지킴이 변호사로 다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다. 엘리트 코스를 밟고 검사가 된 그를 두고 사람들은 법무부 장관과 같은 최고의 법조인이 될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청소년 지킴이가 되어 낮은 곳에서 소외된 이들을 찾아다녔다. 청소년 사업에 몰두하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그는 과연 참된 성공이 무엇인지,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진정한 우리 시대의 멘토 역할을 하고 있다.

KTV “강지원의 정책데이트”, EBS FM 강지원의 '특별한 만남' 등
다수의 프로그램 진행으로 대중에게 얼굴을 알린 바 있으며,

2008년 제3회 대한민국 인터넷 대상 공로상, 2007년 국민훈장 모란장,

2003년 대통령표창 등을 받은 바 있다.

‘강지원 생각 큰 바위 얼굴 어디 없나’,

‘어린이 청소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등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

입력 : 2009.06.03 10:47 / 수정 : 2009.06.03 10:50